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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bers, 또는 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불 꺼진 다리미라 쓸 곳이 전혀 없어
가만히 피릿대로 꺼진 재를 헤쳐 보네
/금오신화 이생규장전, 김시습
마이크 올드필드를 처음 들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긴 듯한 튜뷸러 벨즈의 어떤 부분에 빠져들었고, 초기의 세 앨범에 대해서도 비슷하니 그랬다. 이후의 몇몇 소품들도 나름 괜찮았지만 더이상의 새로움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의 음악적 여정은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도전으로 시작했으나 그를 발탁한 버진의 리처드 브랜슨과는 달리 예상된 항로를 벗어나지 않는 패턴으로 고착되어버린 듯한 아쉬움이 있다. 그런 이유로 해서 guitars 앨범을 들었을 때도 꽤 실망스러웠고 피상적인 감상으로 흘러가는 듯한 embers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이 아주 내 마음을 떠나지 않은 것은 그 싸구려 같은 느낌에서조차도 나름의 매력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일렉트릭 기타가 신세사이저처럼 들리는, 그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의 인트로를 생각나게 하는 이 라이브가 그렇다. ember는 장작이나 숯이 타다 남은 것을 의미하는데 ‘잉걸불’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고 잠시 활활 타올랐으나 이후 길고 밋밋하게 사라져가는 ‘잔불’ 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 노래의 느낌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또는 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embers, mike oldfield
별에의 고별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이별 작별 헤아리다 반쪽이 되어 별꼴 다 보였지요. 별빛에 물든 밤같이 까만 눈동자가 어둠 속에 잦아드네요. 별안간 그리움에 하늘 돌아보네요. 청천 하늘에는 잔별도 많았더라. 저무는 바닷가엔 석별도 많다더라. 전별 송별 다 보내고 결별 고별 지웠지요. 별의 별별 모두 떠난 자리 홀로 채워가며 기별 하나 빛날 날만 기다리지요. 지은이도 모르는 별, 어디 별뜻이야 있겠습니까만 각별이 타고 남은 빈 자리 하나 이 몸 이루었으니 너와 나 따로 없어 하나같이 드물고 별난 일입니다.
M.C.
그때 나는 기공식장을 서성이고 있었어요. 흠흠… 지겹고 졸리우는 알파 파형의 무조 팡파레를 기다렸는데… 어딨더라 불연속 문양으로부터 둘, 셋, 다섯, 일곱 나비가 쏟아져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노랑나비는 까만나비, 호랑나비는 흑백나비, 1 아니면 자신뿐인 외로운 숫자들입니다. 그것 참 몇마리 뿐인 것 같은데 한량없이 이어집니다.
흘흘… 그때 누군가 마구 흔들어 나를 깨웠습니다. ㅡ 아니 이제 꿈꿀 시간이래요, 미스터 M.C. 하얀 새는 밤으로, 까만 새는 낮으로 날아가는데 경계선이 없음은 당연지사인가요. 끌끌… 어떤 파도도 움직이지 않는 상대성입죠. 물밑으로 새가 나는 유연성입죠. 알파 수면의 번성을 위한,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빠른 눈 운동입죠.
쯧쯧… 모르스 부호처럼 위태로운 탄식입니다. 난조에 빠져버린 마인드 컨트롤입니다. 그의 길을 따라가며 얻는 것, 그의 물길을 따라가며 유실하는 것, 그의 문양을 헤아리다 분해되는 퍼즐입니다. 부실한 유한각체는 꿈을 꾸어보지만 흑흑… 숨차고 눈물나는 지금 이 길은 비내리는 고모령입니다. 절체절명의 마인드 컨트롤 ― 들쑥날쑥 랜덤으로 출력되는 페시미즘입니다.
어쩌면 주사위 일곱개로 펼쳐질지도 모를, 해설이 필요없는 진짜 현실입니다. 펜로즈의 삼각형을 따라, 비슷한 곡률을 지닌 회색 무지개를 따라가는 오르막 내리막입니다.
그럼 나는 준공식을 기다리며 망상어를 풀었습니다. 잠시 시선을 잃은 사이 그것은 또다른 바다에서 또다른 뭍으로 숨쉬며 기어가는 몇억묵은 고집같은 공극어로 문양을 바꾸어 갑니다. 파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다, 바다가 있기만 하면 어딘가 뭍은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럼 오늘도 당신은 즐겁고 지루한 여행입니다.
퍼펙트 데이
그 사이 몇 개의 빈 칸이 질러져 있었을까
상그리아 홀짝대던 공원의 꿈을 깨고
퍼펙트와 데이 사이에 무엇인가 빠져버린 날
무비 스타도 은막의 제왕도 부러울 것 없는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하지만 빈센트 퍼니어의 달콤했던 침대는 전무후무였고
너와 나 사이에서 내가 빠져버린 날
슬픔이여 좋은 아침
화창한 날의 햇살
온종일 소리로 채워보려 하지만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의 길
심은대로 거둘지니
퍼펙트와 데이 사이가
칼날처럼 위태롭고 퍼펙트하게 아득한 날
있는 그대에게
없는 그대에게
+
다섯 곡의 노래 제목과 그들의 가사 일부,
그리고 단편 제목 하나를 차용하였다.
이 글을 쓰게 만든 여섯번째 노래는……
책들의 운명
피치 못할 운명이 만들어낸 어떤 방이 있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거나 잃어버렸을 크게 다르지 않은 방이다. 애초에 책장이가 없던 그곳에 어느 날 나는 책을 가져다 둘 마음을 내었다. 그리고 책장을 마련하면 무슨 책들을 꽂을지 생각을 좀 했다. 전공이라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을 정도, 나는 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철학적인 것을 싫어한다기보다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조금 냉소적이었던 것 같다. 추리소설과 과학소설, 환상소설을 좋아했었고 천문학, 물리학이 보다 철학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그때 구입했던 관련서적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분야는 펼쳐본지 오래다. 아무튼 이런저런 변화를 거치며 어딘가에 좋아하는 시집과 좋아하는 작가의 (거의 전집에 가까운)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책장 한단 정도의 크기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두 개의 칸으로 된 얇다란 책꽂이를 하나씩 구입해서 틈나는대로 조립하고 쌓아 단출한 책장을 완성하였다. 게으르고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 하얀 책꽂이가 바래가며 연미색으로 바뀌어가는 세월에 대해 생각하며 조금 소박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장의 빈 자리에 전혀 엉뚱한 것들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래봤자 그다지 의미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찮은 내 꿈이 꼭 그만큼으로 하찮게 엉클어짐에 낙담했으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어느 날에는 조립해서 쌓아뒀던 책꽂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버렸고 튼튼하지만 아주 버겁게 생긴 큼지막한 책꽂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새하얀 나의 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전혀 다른 용도의 물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투박한 책꽂이에는 겨우 두세칸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꽂혀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에 점차 익숙해졌고 이 모두가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려니 했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무색하게도 더 투박하고 더 높아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가 새로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아끼는 책들은 모두 엉뚱한 장소로 옮겨져 있었다. 다시 한번 화를 참기 어려웠고 그 책들을 닥치는대로 끄집어내어 보따리를 쌌다. 어딘가 전혀 다른 곳에 그것들을 방치하기 위하여. 잃어버릴 수도 있고 쉽게 삭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려니 할 것이다. 그것에 관한 예감을 갖고 있었던지 언제부터인가 책을 갖기 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를 더 좋아하고 필요한 부분만 기억하는 것을 더 즐겨한다. 많은 것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겠지만 그것이 영원한 망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믿는다. 그리고 흩어져버린 책의 운명은 <애플비씨의 질서바른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질서는 무질서에 패했고 그 무질서는 자신의 잘못과 죄에서 비롯된 것임에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살아 있는 한 감내해야 할 죄값인지는 납득할 수 없지만, 책들이 나의 운명인지 흩어져버린 책꽂이가 나의 운명인지 천장까지 다다른 텅 빈 책장이 그러한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다.
+스탠리 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