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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enseur pour

가끔씩 생각나는 한줄들, 어떤 때는 잇사가 위로가 된다. 바쇼에 비해 질곡의 삶을 살았건만, 그래서 가끔 꺾이기도 했지만 그는 오직 그것을 견뎌내며 한줄을 쓰는 것으로 일관했었나 보다. 잇사를 생각하면 하찮은 내 인생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참 아무 것도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 1월 어느 날의 소감을 뒤돌아보며./2017. 6. 15.

 

월요일부터 얼어붙었던 수돗물은 금요일 사무실 나오니 풀려 있었다.
목요일 퇴근 전에 물 두어통이랑 생수병 몇 개
이웃집에서 갖고 올 때는 그것이 하루를 버텨줄 요긴한 필수품이었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된 바로 순간
“맹물보다도 못한” 하찮은 무엇이 되어버렸다.
나도 누군가에 또 내가 누군가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세상을 사는 것은
거듭 겨울비를
긋는 것//소기

 

늦은 출근 ㅡ 사무실 오는 길에 한참 멀리 위쪽에서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수레 뒤로 차가 따라오는데 귀 어두우셔서 잘 모르는가 싶었다.
마침내 경적을 울리고 우여곡절 끝에 차는 피해갔고
나는 눈짓 손짓으로 2층으로 모시고 커피 한잔 같이 마셨다.
한달여 모아둔 폐지와 사무실에서 쓰려고 뒀으나 잘 입지 않는겨울옷 두 벌 드렸고
수레를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조금 끌어드리고 올라왔다.
그 잠깐 동안은 최근의 우울을 잊고 있었나 보다.

 

둥근 집이야말로
사각 집보다 좋아라
한겨울 칩거//사와 로센

 

힘들어서였을지 아니면 초탈해서였을지 아니면 어떤 달관이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은이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요즘의 내 느낌도 비슷하다.
이렇게 완곡하게 썼으니까 내 뜻대로 마음대로 고쳐서 생각하기도 좋다.
하지만 고바야시 잇사를 생각하면 괴로움에 대해서는 말하기 쉽지 않다.

그는 전혀 초월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세파에 부대끼고 그 속에서 숱한 고초와 아픔을 겪었으나
남달리 험난했던 삶에 완벽하게 굴복한 적은 없었는가 싶다.

 

여윈 개구리
지지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잇사

 

모르긴 해도, 또 그가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느낌으로는 잇사에 제일 마음이 갔다.
(그것이 그를 좋아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사연이 담긴 그의 몇몇 글에서는 감정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개구리 하이쿠처럼 아이들에 관한 것은 특히나 그랬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책 두 권을 읽으면서 70여 페이지로 요약을 했다.
피난처였다.

 

다만 있으면
이대로 있을 뿐
눈은 내리고//잇사

 

 

+
잔느 모로, 또는 어떤 이가
비슷하니 길을 걸을 때
트럼펫 소리가……

 

/2016. 1. 30. 21:49.

 

 


ascenseur pour l’echafaud / miles davis

 

 

九點煙구점연에 갇히어

누군가? 나의 서러운 한 권의 시집을
소중히 읽어 벌레 먹지 않게 할 이.
/이하

 

휴관을 앞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 할 마감일이다. 삼국유사를 편역한 두 책은 끝까지 다 읽지 못했음에도 그다지 미련도 아쉬움도 없지만 이하 시집을 돌려보내려니 좀 허전하였다.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대로 몇 페이지 카피를 하다 그것도 마땅찮아 찾아봤더니 구할 수 있는 책이라 바로 주문을 했다. 역자의 번역이 아주 시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완역본인 만큼 두고두고 보고 싶었기에 그랬다.

미리 써버린 내 ‘스완 송’의 소재가 되었던 “백옥루”+에 관한 이야기는 <태평광기>에 이하가 말한 것으로 나와 있고,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기록 <이장길 소전>에도 기술되어 있는데 그의 글에는 이하를 하늘나라(?)로 데려갈 저승사자가 했던 말로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일종의 ‘전해오는 이야기’임에 본질은 이하의 말에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옛 현암사판의 번역으로 <夢天몽천>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이 땅을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단이 전혀 없던 시대에도 남다른 안목과 불허의 상상력은 그 모두를 뛰어넘었나 보다.  나는 이 하루도 ‘九點煙구점연’에 갇힌 채 까마득히 잊고 있으니 그가 夢天에서 봤던 것은 통찰이고, 나의 현실은 夢天인지도 모를 일이다.

 

달 속의 늙은 토끼와 한기 느낀 두꺼비가 우는 듯한 하늘 빛
구름누각 반쯤 열리자 벽 사이로 비스듬히 내비치는 새하얀 달빛
옥 바퀴 이슬에 구르자 물기를 머금은 듯 달빛은 몽롱해지고
계수나무 꽃향기 피어나는 길에서 선녀를 만난다.
삼신산 아래 인간 세상을 바라보니 누런 먼지와 맑은 물뿐
변화를 거듭하는 천년 세월도 달리는 말처럼 한순간이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중국 땅은 아홉 점 먼지
넓은 바다도 쏟아 낸 한잔의 물에 불과한 것을.

/꿈속에 하늘에 올라, 이원섭 역.

老兎寒蟾泣天色 (노토한섬읍천색)
雲樓半開壁斜白 (운루반개벽사백)
玉輪軋露濕團光 (옥륜알로습단광)
鸞佩相逢桂香陌 (난패상봉계향맥)
黃塵淸水三山下 (황진청수삼산하)
更變千年如走馬 (갱변천년여주마)
遙望齊州九點煙 (요망제주구점연)
一泓海水杯中瀉 (일홍해수배중사)

 

 

/2017. 6. 13.

+상제께서 (시인, 묵객들이 머물) 백옥루를 짓게 되어 상량문을 써라고 한다.

 

 

travelling song, 그리고 flora

“오미 와이즈”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버트 잰쉬의 목소리를 무척 좋아했었다.
대단한 노래 솜씨를 지닌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pentangle” 하면 나는 투박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목소리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travelling song”은 라이브가 10배쯤 더 멋진 것 같다.
장미빛 뺨과 루비 같은 입술을 지녔다던 플로라,
질투와 배신감으로 플로라의 애인을 단검으로 죽이고
살인죄로 법정에 선 이로서도 그의 음성은 꽤 인상적이었다.
“꽃순이를 아시나요, 꽃처럼 어여쁜 꽃순이…”의 영탄뿐인 화자에 비해
플로라를 짝사랑했던 심히 무모했던 인생의 목소리로도.
하지만 더 어리석고 무모한 인생은 travelling song의 주인공처럼
꿈꾸던 집(또는 ‘제일’하우스)을 향해 달리지 못하고
플로라의 애인이 아닌 플로라를 죽인다.

i don’t mind the drizzling rain
inside it is warm and dry……
그 느낌 잃어버릴까 점점이 잊혀져갈까 두려워하며. /srs.

 

골짝 어귀에서

푸른 치마 아가씨 목화 따러 나왔다가
길손과 마주치자 길가로 돌아섰네
흰둥인 누렁이의 뒤를 따라 달리더니
주인아씨 앞으로 짝지어 돌아오네+

 

知音에게 알리기도 쉽지 않은 일 ㅡ 빠를 젠 빠르고 높고도 낮게, 나이 이제 열아홉인데 벌써 비파 잡고 다룰 줄 안다며+ 신광수의 넉 줄은 태연스레 그윽하였습니다. 원문을 읽으면 그 노골적인 글자들을 말로 옮기지도 못할 정도였지만요. 峽口所見이라는 짧은 만남에 관한 단상에도 그런 느낌 없지 않아 제목마저 조금 달리 보이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while my guitar gentley weeps ㅡ 비파 다루는 것 알지 못한 채 골짝 어귀에 서 있는 남자를 떠올려 봅니다. 주인아씨 앞에서 뛰놀던 백구 황구를 바라보던 개같지 않은 인생이 지사도 열사도 상열지사도 아닌 개같은 내 인생인지는 알 길이 없고, 撐天의 그렇고 그런 시절도 이젠 아닌 듯 싶지만요. 기세등등 어디로 갔는지 기타등등일 뿐이지만요, 등등.

 

+峽口所見, 정민 역.
+신광수의 시 배열을 뒤섞고 내용을 조금 바꿨음.

 

/2017. 5. 22.

꽤 오래된 시론

그저께 빌려왔던 책, 사흘 동안 안고 산 것은 아니지만 머리 속에선 내내 그랬다. 처음 펼쳤을 때는 모처럼 읽을거리 많은 책을 만난 것 같아 좀 들떴나 보다. 저자, 또는 편역자에 대한 느낌은 아주 조금 달라졌지만 배울 것이 많은 책이어서 그저 감지덕지일 따름이다.  그분의 지지자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책들도 빠짐없이 읽고 싶어질만큼. 서두에 있던 박지원의 인용부터가 인상적이었다. 해설까지 마음에 쏙 든 것은 아니어서 나는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직 나만의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책을 읽고 시를 읽고 심지어 쓰기까지 한다는 것, 그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리라 나는 생각한다 ㅡ 그것을 문자로 한정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의미에서 연암의 글을 시인의 자세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그 짧은 글이 시라고 생각하고 읽었을 뿐이다. 내재율조차도 찾을 길 없다 한들 굳이 산문시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어떤 ‘律’도 그 어떤 ‘룰’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가 쓴 시를 읽었다.

라면 몇 개 안아들고

여섯 시가 되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라면 몇 개라도 챙겨야 했던
전운 감도는 시대의 소시민인양
도서관이 휴관한다는 문자에 우습게도 애가 닳았나 보다
꽤 두꺼운 시집 세 권에 다른 책 두 권을 보태어 대출 권수를 채웠다
생각지도 못한 분의 생각지도 못한 글이 나름 반가웠다
그리고 페이지마다 오래된 새로움이 가득하였다
경운기는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쓰던 시절처럼
숨을 곳 없는 난민의
조금 서글퍼지만 피할 길 없는,
불어터졌지만 오랜 허기 면하는 작은 즐거움 같은 것

/2017. 5. 16.

등화관제가
실시됐던
지나간
여름

사이렌 소리에 불이 꺼지자 망 쳐진 내 창으로 수천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은하수, 정민

+
한시 두시 읊어가며 옮기는 분이라
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이 분의 번역이 좋아서 책 빌려왔는데
대학 시절부터 남달랐나 보다.

srs #3. querência

벌써 너닷새째 골골골이다. 콧물로 해서 코밑은 헐었고 기침은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는다. 잠을 잘못자서인지 다른 문제가 있는지 최근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턱이 아파서 입도 잘 못 벌리겠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루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vitor ramil 의 노래로 알게 되었던 께렌시아, 얼마 전 어느 정치인께서 고상하게도 께렌시아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관해 여지를 남겼다. 입에 담지도 못할 낯뜨거운 소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보니 일견 멋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그런 느낌은 들지가 않았다. 그녀라고 께렌시아에 대해 이야기 못할 일은 없지만 어느 줄에 설지 아니면 발을 뺄지를 가지고 갖다붙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정치인은 투우였을까.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투우사의 잘 벼려진 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까. 아니면 어쩌다 적이 되어버린 다른 소의 뿔에 그렇게 상처를 입었을까…… 단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지 어떨지에 관한 생각이었다면 세상이 께렌시아로 넘쳐나거나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씁쓸한 느낌이었다. 스페인어에서 께렌시아의 어원이라는 ‘querer’에 ‘to desire’란 의미가 있다는데 행여 그거라면 모를까. 그게 힐링의 좀 유식한 척 고상한 척 갖다붙인 이름쯤이라면 또 모를까. ‘께렌시아’는 마뚜 그로쑤에 있는 지명이며, 투우가 안정과 평안을 느끼는 투우장 속의 특정한 장소라는 의미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를 상징하기도 한다(헤밍웨이).

하밀의 께렌시아는 조앙 다 꾸냐 바르가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피할 곳 없는 매일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querência / vitor ramil.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엄마와 너댓살 되어보이는 아이가 여름 같은 봄날의 오후에 놀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처음 본 그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눈이  마주쳤는데 다시 보니 아이가 갖고 놀던 공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그늘막 위로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너무 높아 꺼내기도 곤란한.

나즈막한 언덕으로 되어 있는 뒷쪽으로 돌아서 가봤으나 나무가 빼곡히들 자라 있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쉽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애기 엄마가 벤치 위에 올라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역시나 키가 모자라 되질 않았다.

가만 보니 내가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아 벤치 위로 올라가 생각없이 손을 쑥 넣었다. 그런데 철조망 같은 것이 거기 있었던지 나는 팔을 조금 찔린 채 얼른 손을 빼야 했다. 다시 두어번 조심스레 손을 넣은 끝에 옆으로 공을 굴려 결국 아이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반소매였던 까닭에 팔은 여기저기 좀 긁혔으나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와 아이는 근처에서 조금 더 놀았지만 뭔가 서먹했는지 광장의 저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곤 그 잠깐의 상황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다 오늘 상처를 봤더니 조금 곪아 있었다. 어제의 녹슨 철조망을 떠올리다 갑자기 “파상풍?” 이런 단어가 머리 속을 돌았다. 이상이 회충약 먹던 이야기처럼 좀 웃기지만 뒤늦게나마 간단하게나마 소독도 했다. 하지만 그랬다. 그럴 리도 없지만 백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일억에 하나… (이건 정말 확률로 따질 수도 없는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다) 그 철조망 가시에 뭔가 나쁜 게 있어 내게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봤다. 그다지 생각할 겨를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결과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오래전 언젠가 내가 일을 하는데 덩치도 무지 크고 험상궂은 두 손님이 내 뒤에서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때를 기억한다. 우습지만 아주 잠깐 이 사람들이 내 뒷머리를 내리칠 수도 있으리란 상상을 했다. 그때도 그랬다. 나는 당신들이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하찮은 내 일을 하다 그리 되었음에 개의치도 않고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슷한 심정으로 언젠가의 어느 한겨울날 어떤 술취한 아주머니에게 사무실을 내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아주머니를 믿었지만 돈이든 물건이든 잃어버린다 한들 후회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숱한 의미있는 일을 하거나 타인의 삶과 생명을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거나 역사에 남을 공헌을 하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공 하나 꺼내주다 내게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한들 그게 나쁘지도 억울할 것도 전혀 없는 일이란 것이 내 결론이었다. 나는 그 현실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아주 작은 팔의 상처에 관해서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다. 이게 아주 작은 선의인지, 염세주의인지, 위선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분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내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2017. 5. 1.

 

봄길, 그리고 엘 꼬세체로

엘 꼬세체로는 라몬 아얄라가 쓴 옛 노래다. 소사를 포함한 가수들이 조금 옛스런 스타일로 노래했으나 아르헨티나 출신의 차로 보가린과 디에고 뻬레스가 짝을 이룬 또놀렉은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이 곡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목소리에서 오는 뭔지 모를 헤픈 느낌에 아련한 분위기의 피아노 소리는 몇해 전 어느 한때 약간의 중독성을 띠고 내게로 왔다. 아래의 동영상은 또놀렉의 라이브보다 이들 노래의 미묘한 분위기를 더 잘 전해주는 것 같다 ㅡ 조금 위태로운 방식으로. 노래 속의 엘 꼬세체로는 목화를 수확하는 이인 듯 싶으나……

 

모란도 시들어가는
한창의 봄날 연등길 따라
멀찌감치 엉덩이 드러낸 처자
아직은 깨닫지 못할 세월인양
걸음 바쁘다
눈도 따라가지 못할 그 길
이제는 아득한 풍경
느릿하니 노 저으며
바닥없는 배를 타고
나는,

 

 

/2017. 4. 27.

 

 


el cosechero / tonolec

 

 

그 집 앞

사무실 오는 길에 세탁소에 들러 옷 두개 드라이 맡겼다. 아파트 바로 위에 세탁소가 있어도 굳이 옷을 들고 이곳까지 온다. 할머니와 둘이서 사는 이분께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고 최근에 할머니가 안보이는 날이 많지만 물어볼 수는 없다. 그저 인사나 하고 아무 때나 천천히 찾으면 된다고 재촉하지 않을 뿐이다.

몇몇 가게가 잇달아 폐업을 했던 자리에 들어선 빨래방 앞을 지나면 늘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이 금세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개업하던 날 이곳의 주인과 친지들이 조그만 원탁에 둘러앉아 성경책 펼쳐놓고 기도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는데(나는 그 앞을 지나가며 그 기도에 동참했다 생각한다) 한동안은 세탁기 돌아가는 모습을 보기 어렵더니 최근 들어선 손님들이 오가는 것이 자주 보였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화학식으로 표기될 수 있는 세제의 첨가물일 뿐이라도 빨래방을 지날 때 나는 향기는 뭔가 상쾌한 느낌이었다.

오늘 멀찌감치서 보니 빨래방 앞에서 누군가가 어떤 할아버지께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한참을 상세히 설명하는 이는 그곳 주인이었다. 기도하던 그날의 모습이 어찌 좀 마음을 쓰리게 했는데 아침부터 청소를 하고 영업 준비를 하는 것이 노래 속의 ‘미싱’처럼 세탁기도 잘도 돌아가는가 싶었다.

글도 안되는데 서버가 애를 먹여 닷새 가량을 답답한 심정으로 피곤하게 지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듯 싶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향기는 풍기지 못할지라도 그저 빨래방의 세탁기처럼 돌아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사계”를 조금 고쳐서 말한다면,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는데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를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