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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애사

주차공간에 여유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 오면 부득불 중평행주차를 하고선 폐가 될까 염려하여 새벽에 나와 빈 자리를 찾아 차를 옮기곤 했다. 그럼에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은 대부분이 남는 자리여서 밤늦게 들어온 차들은 통상적으로 그곳에 주차하곤 했다. 장애인용 주차표식을 단 차량들이 주차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단 한번도, 어떤 경우에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에 차를 세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자리를 괜찮은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즐겨 주차하는 자리는 장애인용 자리 옆자리다. 그리고 그곳 주차장의 한 모퉁이는 양 변이 장애인용 주차자리인데다 모서리는 공간이 꽤 넓어서 차를 대고도 남을 정도였고 통행에 불편을 주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도 자주 주차를 하곤 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차를 대는 것을 ‘곡각주차’라고들 한다. 양 변의 끝자리(장애인용 자리)에 차를 대는 사람들이 조금씩만 공간을 넓혀주면 두 변의 모서리 자리는 차를 대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에 그 자리가 비어서 나는 그곳에 주차를 했다. 바로 옆으로 붙은 장애인용 자리 하나는 장애인 아닌 분이 주차를 했고 직각의 다른 변의 장애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에 밖에 나와 보니 남은 한 자리에 장애인용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일반인들이 가장 무난하게 선망하는 모 자동차 회사의 조금 큰 중형자동차였다. 아마도 출고한지 얼마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분이 굳이 (상당히 넓은 장애인용 주차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차 옆으로 잔뜩 붙인데다 주차정지 턱까지 후진도 하지 않은 채 주차를 한 바람에 모서리의 내 차는 양쪽 변의 차 가운데 하나가 빠지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도 그런 상태라면 좀 난감할 뻔 했으나 다행이도 비장애인인 분이 아침 일찍 차를 빼서 나가는 바람에 내 차가 나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가급적 그 자리에 주차를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 장애인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는 늘 비슷한 방식으로 주차를 했고 결국 한번은 곤란한 상황을 목격하였다. 꼭 내 경우처럼 어떤 분이 모서리에 차를 댔는데, 역시나 그 검은 자동차는 모서리 쪽으로 붙인 채(그 검은 차의 옆자리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이어서 반대쪽은 필요 이상으로 텅 빈 공간이 생겨 있었다) 주차를 해서 모서리의 차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나는 모서리의 차주가 어떻게 문제를 풀지 조금 궁금하였고, 직각으로 두 변에 설치된 장애인 주차공간에 세워진 두 대의 차 ㅡ 한 대는 장애인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 다른 한 대는 비장애인의 ‘불법’ 주차, 차주들은 어떻게 반응할지쓸데없이 염려가 되기도 했다. 나 같으면 또 그 난감한 상태를 어떻게 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모서리에 주차했던 차주는 출근하려고 나와서 보니 차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보고선 양쪽 옆의 차들을 번갈아 살펴보며 한참을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국은 포기를 하였는지 그냥 걸어가는 것이었다.(아마도 그 분은 택시를 타고 갔으리라 생각된다.)

이후에도 가끔은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들이 몇 번 있긴 했으나 다행이 차가 못나가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있었는데 내가 알지 못했을지도. 게다가 그 검은 자동차의 차주는 지상보다는 지하주차장을 선호하는 듯하여, 항상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두 달 쯤 뒤, 지하주자창 보수공사가 몇주간 계속되었다. 그러다보니 지상주차장으로 차가 몰려서 그야말로 ‘주차장’이 되어서 차 한번 나가려면 몇 대의 차가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내 경우도 평행주차하고 전화번호를 붙여놨다가 아침 여섯시에 화난 젊은 여성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그 여자분이 언성을 높인 이유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지만 미군 자동차의 부속품들에 끼워맞춘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이름이 최무성 형제가 만든 상표명 ‘시-바 ㄹ’의 ‘시발자동차’라는 것,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난리통의 와중에도 검은 자동차는 여전히 모서리쪽으로 붙인 채 여유롭게 주차를 하여 차 한 대 주차할 수 없는 공간을 아예 막아버리곤 했다. 그다지 넓지는 않은 지상주차장인지라 자동차 세대 정도가 평행주차 해버리면 밀어서 해결할 수도 없는데 꼭 그런 곤란한 상황이 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자동차가 장애인 표식을 달고 장애인 자리에 주차를 했고, 모서리 주차는 아주 엄밀히 말하자면 (그게 법적인 구속력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파트 규정상 맞는 일은 아니기에 그 검은 차가 잘못한 것은 없다. 하지만 몇주 동안 심각한 주차난을 겪는 동안 그 차가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몇 번의 작은 사건을 통해 예상할 수는 있었다. 그로 인해 꽤 많은 사람들이 불편했음에 관해서도.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그 차주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 부부는 어딘가 스포츠센터나 수영장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이미 모서리에 주차된 차를 보고선 주차를 했는데 내려서는 옆의 차를 훌끔훌끔 보더니 아내 쪽에서 폰으로 사진을 찍고선 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차가 나가다 긁기라도 하면 ‘범인잡기’에 대비하는 모습인 듯 싶었다. 주차하고 들어가면서 보니 그 검은 차는 주차선의 정중앙으로 정확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에서 보아가며 조금만 오른쪽으로 주차했어도 사진 찍어가면서까지 신경쓸 일은 없었을 것도 같았지만 그분들 속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검은 차가 등장하고나서부터 나는 아주 확실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그 곡각지에는 절대 주차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딱 한번, 장애인용 자리에 일반인들이 주차하는지 조사하러 온 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분은 매우 당당하게 장애인 자리에 주차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분의 차에 장애인 표식은 물론 없었고 그 시간에 장애인 자리에 주차된 자동차는 그 단속차량이 유일했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자질구레하고 긴이야기는 비장애인의 그다지 크지 않은, 사실은 아주 작은 장애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면 내가 굳이 문장으로 쓰고 싶지는 않은 그 반대의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소소한 駐車場哀史거나 그에 못지 않은 소소한 駐車障碍史거나.

라 칼리푸사, 안토니오의 노래

오래도록 나는 ‘라 칼리푸사’가 술집 내지 클럽의 이름이거니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la, california, usa’의 아나그램이었다.

마이클 프랭스의 antonio’s song은 달달하기만 하고 그 노래가 안또니우 까를루스 조빙의 음악을 잘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별로 없다. ‘프레부'(헤시피 축제의 쌈바/리듬) 같은 삶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더불어 ‘mpb’, 그러니까 ‘무지까 빠뿔라르 브라질레이라’로 불리우는 브라질 대중 음악의 수준을 한차원 높은 곳으로 이끌어간 ‘마이스뜨루’임에 틀림없지만 쌈바를 작곡하고 노래한 ‘쌈비스따’라고 부르기는 적절치 않은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그 노래의 한 대목에 끌리곤 했다.”내 희망의 대부분이 사라졌을 때 안토니오의 쌈바가 날 아마존으로 이끌었네(when most of my hope was gone antonio’s samba led me to the amazon)”라는 소절이다. 그리고 한때는 내게도 ‘안토니오’의 것이 아닌 ‘안토니오의 노래’가 있었다만 지금은 무엇이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딘지 모를 ‘라 칼리푸사’를 배회하며 most of가 아니라 all of인 것처럼 느끼고, 고통이 잉태한 즐거움이란 ‘虛辭’라고 여기며 안토니오의 노래로부터 아득히 떨어져 있을 뿐.

mjb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 오고 체전부(遞傳夫)는
이따금 ‘하도롱’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愁心)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도회(都會)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산촌여정, 이상

그래도 좋았고 아니라도 좋았습니다. mjb의 향기, 그건 연인의 이니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커피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 찾아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네요. <산촌여정>이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청춘의 시절엔 검색창 대신 창의 바깥을 바라보며 mjb를 상상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무더운 이국의 슈퍼에서 커피를 찾다 초록빛 mjb를 보았습니다. 80여년의 세월을 넘어 그 이름이 실물이 되어 내 앞에 있었습니다. 그저 드립커피일 뿐이었지만 양철 지붕 위에 쏟아지던 별빛 소리를 기억하며 다소곳이 커피를 집어들었습니다 ㅡ 향기로운 엠제이비의 미각을 까마득히 잊고 지낸 것이 20일이 아닌 20여년은 더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어쩌면 영영 봉지 그대로인 커피 mjb. 검색창 너머 창의 바깥으로 그리고 그렸던 mjb. 그건 연인의 이니셜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좋고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낡디 낡고 해진 ‘하도롱’빛이지만요. 빛…… 커피는 별맛없이 쓰기만 했고 나는 그 무엇도 쓰지 않았습니다.

 

 

느리고 뜨겁고 무거운

노래+는 오수처럼 겨드랑이 밑에 간지럽다.
이미지는 멀리 바다를 건너 간다.
벌써 바다소리마저 들려온다……
그리곤 언제나 어느 나라인지도 모를 거리의 십자로에
멈춰 서 있곤 한다.
/첫 번째 방랑, 이상+

 

<비야 비야>에서 <하크티바>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진 어떤 나라의 노래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들 노래처럼 유서깊다. <비야 비야>는 어찌 그리도 마음 아프게 들렸는지, <망향>을 처음 들었던 날 그 촌스런 번안가사를 수없이 불러대며 외워버린 것은 어째서였는지……

하지만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을 통해 이 나라의 음악을 한층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은 몇해 전의 베리 사카로프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처음의 처음에 <monsoon>이 있었고 그것은 느리고 뜨겁고 무거운 바람이 부는 또 다른 세계였다.

터키의 유태인 가문에서 태어난 베리 사카로프(1957년~)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록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관되게 록 음악을 해왔지만 속도감과 격렬함을 표출하기보다는 느리고도 함축적인 강렬함을 추구해왔다. 그는 쟝르를 달리하는 꽤 다양한 가수와 노래했으며 자신의 음악에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몬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일종의 정형성을 지닌 락 발라드라기보다는 엑조틱한 아트락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몇해 전의 어느 날 지구 저편으로부터 내게로 불어온 바람은 시간을 거슬러 지금 다시, 나를 지나가고 있다. 마음 같은 바람, 마음 같은 노래 ㅡ slow hot wind가 묵직하니 마음을 뚫고 지나갈 때 바로 여기를 가장 낯선 이국이라 여기며.

 

כנראה שזה ככה
בחלומות.
카니레 쉐제 카하 바할로못

아마도 그건 꿈속이었을 거야
(너가 내게 온 것도 멀리 떠난 것도)

 

몬순은 지역에 따라 바람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불어오는 계절풍을 뜻하기도 하고 우기를 의미하기도 하며 아랍어 mausim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 그가 몬순을 노래한 이스라엘은 여러 기후가 섞여 있지만 몬순이 아닌 지중해성 기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 몬순은 오직 베리 사카로프의 땅일 뿐이다, 결국 꿈에 불과했던, 또는 그 자체였던.

 

 

/2017. 7. 15.

 

 


ברי סחרוף / מונסון

 

 

+
이상 원문의 첫단어는 ‘노래’가 아니라 ‘글자’인데 변용한 것이다.

für “elysee”

1999년 아니면 2000년 쯤 만년필 하나 선물 받았다. ‘건필 기원’의 뜻을 담은 메모와 함께. 중학교 들어갈 때 만년필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고 18세 쯤에는 어딘가 강제로 참석했던 자리에서 ‘아피스’ 만년필 같은 것 하나 얻었던가 모르겠다. 그 이후론 처음이었다.

꽤 오랜 기간 메일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근무하는 곳이 집과 가까웠기에 (이작자 여인숙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전히) 몇 번 만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전혀 연락도 되질 않는다. 사람도 잊었고 만년필도 잊은 채 그것을 받은 때로부터 거의 17년 쯤의 시간이 흘렀나 보다.

지금도 달리 아는 것이 많지야 않지만 그땐 이 만년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감사히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컴퓨터에서 글쓰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던 내가 그걸 실제로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해 전 잇달아 두 자루의 펠리칸 만년필을 구입하고서야 새삼스레 서랍 속에 묻혀 있던 펜을 다시 꺼내 써봤고, 올해 다시 찾아봤다. 자세히 살펴본 만년필은 독일 제품으로 elysee란 회사의 것이었다.

elysee 만년필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80년대 스타일의 가늘고 긴 바디에 부드러운 닙을 갖고 있다고 했고 가느다란 모양새와는 대조되는 m 규격의 닙에 대한 내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lysee는 사실은 für elise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고 불어에서 élysée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낙원’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나올 뿐이다. 만년필을 만든 회사는 2000년대 초반 즈음에 생산을 중단하였고 그것을 선물해준 사람은 이제 기억 저편에 있다. 하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다.

17년 전의 기원은 일찌감치 효력을 상실했을지 모르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새것인양 반짝거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기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물건은 때로 사람보다 오래 간다던 어떤 이의 씁쓸한 지적을 슬쩍 잊은 척 하곤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끝>에서 홀로 남겨진 ‘최후의 인간’처럼 그 만년필이 지금까지 내게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責책’하게 하거나 ‘勵려’하게 하곤 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elysee 만년필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런 것이다.

 

/2017. 7. 10.

 

+
발음이 비슷해서일까. 그런데 이 만년필 메이커 이름을 보면
자꾸 톰 제의 어떤 노래 생각이 난다.

für "elysee"

1999년 아니면 2000년 쯤 만년필 하나 선물 받았다. ‘건필 기원’의 뜻을 담은 메모와 함께. 중학교 들어갈 때 만년필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고 18세 쯤에는 어딘가 강제로 참석했던 자리에서 ‘아피스’ 만년필 같은 것 하나 얻었던가 모르겠다. 그 이후론 처음이었다.
꽤 오랜 기간 메일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근무하는 곳이 집과 가까웠기에 (이작자 여인숙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전히) 몇 번 만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전혀 연락도 되질 않는다. 사람도 잊었고 만년필도 잊은 채 그것을 받은 때로부터 거의 17년 쯤의 시간이 흘렀나 보다.
지금도 달리 아는 것이 많지야 않지만 그땐 이 만년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감사히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컴퓨터에서 글쓰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던 내가 그걸 실제로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해 전 잇달아 두 자루의 펠리칸 만년필을 구입하고서야 새삼스레 서랍 속에 묻혀 있던 펜을 다시 꺼내 써봤고, 올해 다시 찾아봤다. 자세히 살펴본 만년필은 독일 제품으로 elysee란 회사의 것이었다.
elysee 만년필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80년대 스타일의 가늘고 긴 바디에 부드러운 닙을 갖고 있다고 했고 가느다란 모양새와는 대조되는 m 규격의 닙에 대한 내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lysee는 사실은 für elise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고 불어에서 élysée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낙원’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나올 뿐이다. 만년필을 만든 회사는 2000년대 초반 즈음에 생산을 중단하였고 그것을 선물해준 사람은 이제 기억 저편에 있다. 하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다.
17년 전의 기원은 일찌감치 효력을 상실했을지 모르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새것인양 반짝거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기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물건은 때로 사람보다 오래 간다던 어떤 이의 씁쓸한 지적을 슬쩍 잊은 척 하곤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끝>에서 홀로 남겨진 ‘최후의 인간’처럼 그 만년필이 지금까지 내게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責책’하게 하거나 ‘勵려’하게 하곤 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elysee 만년필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런 것이다.
 
/2017. 7. 10.
 
+
발음이 비슷해서일까. 그런데 이 만년필 메이커 이름을 보면
자꾸 톰 제의 어떤 노래 생각이 난다.

그리고 너는

아득히 까마득히 알고도 몰랐고 알았지만 몰랐다
마당의 연못엔 알지 못할 구멍 뚫려 있었으나
위태로운 세계에 뿌리를 내린 채 연꽃 하나 피었다 졌다
蓮이 있기는 있었는지 바쁠 일도 아닌 것에 허둥대며
한번 돌아보지도 못하고 나는 떠나왔다
다시 찾아오니 꽃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연밥이 걸려 있었다
거기서 전화기를 그렸던 너는 말을 건네었고 나는 귀를 기울였다
소식 기다렸던 나비는 누군가의 귀처럼 연밥에 날아들었고
소리 대신 향이 울렸다
마음의 짐이라도 널어야 할 옷걸이가 숨은 그림처럼
여기저기 감춰져 있었으나
거기 어떤 緣이 있기는 있었는지
작은 꽃봉우리 하나 또 올라왔는데 나는 바삐 떠나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던
마당의 연못엔 알지 못할 구멍 뚫려 있었으나 너는

 

 

/2017. 7. 9.

 

 

지금도 그가 시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모두가 그리던 신춘문예의 꿈, 메이저신문에 평론 당선으로 멋진 출발을 했던 그는 글쓰는 이에게 흔치 않은 숱한 풍파를 겪기도 했으나 변함없는 붙임성에 타고난 수완으로 다른 일을 하면서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고 들었지요.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잘 그려지지 않지만 그가 지금 시를 읽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또다른 한 친구는 인물도 참 멋졌습니다. 첫만남에서부터 내가 어설프게만 보였던 그 친구, 이상하게도 뒤늦게 내게 과분한 관심을 보였었지요. 나는 주제넘는 무신경으로 그를 대했지만요. 그는 오래도록 시를 썼지만 나는 그의 시에 관해 잘 알지는 못하지요. 나는 가끔 그가 전공을 살려 평론이나 미학 같은 분야로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긴 했지만요. 이제는 고향이 자신의 마당이 되었는데 그의 얼굴에서 읽히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프로필을 보니 몇해 전에도 시집을 내었다고 나와 있긴 하지만 그가 지금도 시를 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중학교 다닐 적 백일장에서 내가 동시 같은 글로 차상을 받았을 때 바다에 관한 시를 쓰서 장원했던 친구, 그 친구랑도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너무 어려서였던지 시 이야기를 한 기억은 정말 없네요. 그에게 시는 묻혀버린 추억일지 아니면 눈으로 속으로 여전한 시를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요.

대학교 시절 시 쓰는 써클에서 만났던 선배, 낮술 먹고 학교 앞 벤치에서 <명태>를 부르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비슷한 시기에 활자화된 시로 다시 만났던 가난했던 그 선배, 언젠가는 전세 문제로 걱정을 해서 돈을 좀 빌려드렸었지요. 이후로 명절마다 부산 내려오면 한번씩 얼굴 보곤 했는데 조금씩이라도 갚아주면 안될까 하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더니 그 이후로 연락이 끊어졌네요. 다른 사정이 있었더라도 괜찮았을텐데 말입니다. 언젠가 누군가랑 결혼했다는 풍문도 듣긴 했지만 그 선배, 지금도 외로운 밤을 마른 명태처럼 곱씹고 있을지요.

나로 말하자면 이것저것 하릴없이 끄적이기는 했지요. 초등학교 때의 동시부터 이야기하자면 햇수가 부끄러울 정도이건만 나날이 쓰기는 어렵고 의욕도 없지요. 실없는 상념에 의미없는 글자들을 너무 쏟아버린 듯, 이제는 아끼고 또 아낀다고 하지만 감춰둔 비단주머니 속에 남겨둔 사연은 아무 것도 없지요. 오죽하면 이하 생각하며 스완송 같은 시를 쓰기까지 했을까요. 지금도 매일 생각하고 끄적이긴 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가 시를 쓰고 있는지 정말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눈동자 속에 그 어떤 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보여줄 시가 없기 때문일 것도 같아요. 어쩌면 시를 쓰지 않는 당신이 그 잘난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2017. 6. 27.

네이버는 접었다

  • 네이버 뉴스에 사용자가 보기 싫은 댓글이 올라올 경우 이를 접어서 안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추가됐다. 여러 사용자가 접기요청을 하면 현재 댓글에서는 아예 자동접힘으로 처리된다…….. (중략)
  • 가장 많은 변화가 이뤄진 부분은 댓글접기요청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악성댓글이나 광고성 댓글의 경우 사용자들이 신고 버튼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 댓글접기요청은 사용자가 직접 보기 싫은 댓글을 자신이 보고 있는 댓글창에서 바로 접어서 안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다수 사용자가 접기요청한 댓글은 누적 요청 건수에 따라 자동으로 접힘 처리된다…….. (중략)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취임 당시 기술플랫폼으로 진화를 선언하며 “기술플랫폼의 근간은 사용자 신뢰와 투명성 확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작년에 사내 투명성 위원회를 신설하고, 내외부 의견을 수렴해 자사 서비스에 반영해나가는 중이다.

네이버 유봉석 미디어서포트 리더는 “이번 개편을 시작으로 뉴스 댓글창이 더욱 활발하고 건전한 공론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투명성을 제고해나갈 것”이라며 “하반기 중 댓글 작성국가, 작성 기기에 따른 댓글 작성 분포, 연령별/성별 댓글 소비 분포 등도 그래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http://m.zdnet.co.kr/news_view.asp?article_id=20170623103603&lo=zm3#imadnews

 
포털이 가진 과도한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으로서 조금 충격적인 뉴스였다.  가장 큰 문제는 ‘접기요청’이란 것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특정한 댓글에 적정한 사람들의 요청이 있으면 그 댓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린다는 것이다. 위의 기사 인용은 ‘접기요청’이 실제로 이루어진 뉴스를 보고서 찾은 기사다.

문제는, 예를 들어 어떤 댓글에 대해 찬성이 5000이고 반대가 50이라도 ‘접기요청’이 일정수준 발생한다면(당연히 찬성의 수준을 넘을 수는 없다!) 그 댓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린다는 것이다. 다수의 찬성 의견이 그보다 작은 소수의 의견에 의해 뭉개져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접기요청’이 어떤 기사에서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펼침요청’이라는 건 ‘기계적 균등’일 뿐, 뉴스가 지니는 시간적 중대성으로 본다면 뒤늦은 블라인드 해제는 전혀 의미가 없다. ‘접기’를 실행시키는 ‘여러 사용자’의 조건과 로직이 어떻게 되는지는 설명도 없다. 다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일정 수준의 ‘부대’만 있다면 일정부분 특정 여론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기발한(?) 방법은 아마도 추후에 그다지 민주적이지 못하면서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된 국가들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네이버는 이러한 시스템이 ‘투명성 확보’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네이버가 원하는 투명성이란 것이 극소수의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순도 1백퍼센트’를 지향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종의 패러다임 교체 같은 것, 언론사의 특정 인물들을 대신하여 포털/소셜미디어 관련 전문가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가는 시대이기에 이러한 시스템은 더욱 위험한 결정이다. 이런 시스템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고, 계속 엉터리 논리를 고집하며 간다 한들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우려스럽다.

(전적으로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확인한 유일한 비판기사는 단 하나였다.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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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에 관련된 인물의 이름을 넣은 것은 앞으로도 계속 살펴보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