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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기억을 소재로 한 최근의 영화를 봤다. 아주 대충 봐서 영화에 관해선 뭐라 말도 하지 못하겠다. 알다시피 기억이란 굉장히 불확실하고 불분명하며, 뜻밖에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과거에 대한 완벽한 기록이 있다고 한들 희미한 기억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심지어 까마득히 잊어버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느낌은 남아 있음을 나는 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억 그 자체도 아니다. 터무니없는 상실이 안타깝거나 괴롭거나 견디기 힘들 때도 있지만 망각까지 포함하는 오래된 어느 순간의 느낌이나 심정은 그다지 달라지는 법이 없다. 보르헤스에게서 망각에 관한 놀라운 성찰을 배운 이래 나는 기억에 관해서, 엄밀히 말해서는 기억하지 못함에 관하여 한결 편안해졌고 모래성처럼 허물어져가는 기억에 대한 자책에 대해서도 비슷하였다. 르네 마그리트의 기억 ㅡ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에 피를 흘리고 있던 모습에 나를 투영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영화가 보여준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세세한 기억의 정밀한 총합이라기보다는 그 순간들의 느낌과 그 느낌에 대한 믿음으로 남아 있고, 그것은 좀처럼 훼손되는 법이 없다. 굳이 영화를 통해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이.

 

 


/memory 1, rene magritte

바람의 열두 방향

그게 2000년대의 중반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르귄의 단편집이 나온 것을 보고 곧장 구입했다. 아마도 세부 쯤 구해서 하나는 선물을 했고, 잘 펼쳐지지 않는 작은 책이 불편했던 나는 책을 잘라 링으로 묶었다.(선물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어딘가에 원본 그대로의 책이 또 하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여전히 다 읽지 못했다. 나처럼 책읽기에 서툴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녀의 책을 읽는데 뭔지 모를 어려움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고 해도 한줄 한줄 새겨 읽을 수 있었지만 르귄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다. 허사처럼 보이는 묘사가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면 스스로도 조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멜라스에 대해 가졌던 나의 오래된 어떤 거부감이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Ursula K. Le Guin, Acclaimed for Her Fantasy Fiction, Is Dead at 88 - The New York Times

 

그리고 좀 비루한 변명 같은 그 결과, 내가 기억하는 바람의 열두 방향은 여기저기 구멍난 스폰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십수년에 걸쳐 피셔킹을 보았고 다른 몇몇 영화와 책에 대해서도 (이해를 구하기는 좀 곤란한) 비슷한 과정들을 경험했다.

르귄에서도 그럴지는 십여년의 시간을 보낸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그 열두 방향 가운데 하나였던 <파리의 사월>을 여전히 좋아한다. 고독한 어떤 마법사가 꿈같은 마법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친구를 만들고, 애인을 만나고, 친구의 애인까지 엮어서 파리의 사월을 즐거이 거니는 이야기다. 부러운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처음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르귄의 단편집보다는 한참 이전이었다.

나는 이 책의 서두에 있는 슈롭셔의 젊은이를 옛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분이 대신해서 올려주는 형식으로. 그 시가 지닌 문학적 의미에 관해서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내 마음 같았던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2017. 11. 4.

코스모스의 한 줄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따라 흥얼거리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 보았지 별 하나 찾기 힘든 그곳,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이었지
/창백한 푸른 점

 

 

어릴 적에 본 학원사의 <코스모스>는 우주에 대한 상상의 보고였다. 지름 10만 광년의 은하에 수많은 별이 모여 있는 도판을 보면서 무한에 관한 수많은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교양서적이라면 교양서적일 뿐이겠지만 처음 읽었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책에는 은하와 행성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의 투구를 닮은 헤이케 바다의 게와 진화론적 선택을 드라마틱하게 연결시켰고, 불타버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한 묘사는 하염없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코스모스>를 떠올리면 이오의 활화산에서 퀘이저까지, 에라스토테네스에서 인디언들의 문명세계와의 조우에 관한 기록, 뉴턴이 그려낸 바닷가의 소년의 이야기 등이  순서도 없이 머리속에 펼쳐지곤 한다.  하지만 <코스모스>에서 단 하나의 문장을 뽑는다면 나는 그 책의 제일 앞에 있는 짧은 헌정사를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대단할 것도 심오한 것도 없는 연애편지 같은 조금 감상적인 문장일 뿐이지만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나이브해지고 유치해지는 것은 유치한 일이 아니다. 그런 유치함을 다시 경험할 수 없음이 서글픈 일일 뿐. 내 낡고 오래된 코스모스의 처음에 실린 글은 다음과 같다;

 

 

 

 

for ann druyan: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carl sagan

 

 

+
창백한 푸른 점은 칼 세이건이 쓴 또다른 책의 제목이지만
내게 있어 책이 아닌, 시의 제목도 아닌 다른 무언가의 이름이기도 했다.

 

dr. hook

이들의 스테이지를 보면 먼저 눈쌀이 찌푸려질지도 모르겠다. 양아치 같은 인간들이 지저분하고 게걸스런 분위기로 노래하는데다 민망한 장면들도 없지 않다. 술 내지 약에 쩔은 듯 싶고 (누구는 그 몽롱한 세계를 거창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다듬어 “a day in the life”를 만들고 어떤 이들은 살짝 미친 듯 뉴올리언즈의 위치 퀸 “마리 르보”를 노래한다) 싸구려 같은데 묘하게 편안하고 막나가는 듯한데 어찌 좀 속이 후련하고……

애꾸눈 레이 소여가 해적이라면 털복숭이 산적처럼 보이는 멤버도 아닌 다른 한 분, (get my rocks off까지 포함해서) 닥터 훅의 상당수 노래를 작사 작곡한  shel silverstein(‘스타인’이 아니고 ‘스틴’이란다)은 시인 겸 카투니스트에 어린이책도 출판했다는데 정말이지 “믿거나 말거나”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 같은데 신기하게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애절한 노래도 있고, 유머러스한 노래도 있지만 역시나 막나가는 노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로선 닥터 훅 하면 아무래도 첫번째는 “get my rocks off”다. 멋진 리듬을 지닌 이 노래, 듣고 보는 내가 찔리는 듯 그들 대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한 만큼 금기를 훌쩍 뛰어넘어 심히 저질스럽고 노골적인데 나름 절묘하다. 닥터 훅이란 밴드의 이름은 레이 소여에게서 짐작할  수 있듯 ‘후크 선장’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는 한방의 훅.

“get my rocks off the mountain, and roll ’em on down the hill.”
(붙이지 아니함 ㅡ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애써 강조하던 내 시 두어 편도 비슷한 방식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그저 한숨만 쉬는 닥터 후…)

/dr. hook & the medicine show, 1972

 

 

 

진상에게 ◉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이하의 시는 이렇게 시작했다. 젊어서도 젊은 적이 없었던 나는 그 두 줄에서 벌써 ‘진상’을 보았다. “진상에게”의 진상은 이하와 비슷한 연배의 품격있는 청년이었던 것 같지만 그 진상이 허접한 어떤 이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보니 자꾸 엉뚱한 것만 더 눈에 들어온다. 진상은 허상이 되고 거기에서야 진상이 보인답시고 ‘겉보기에 허름하고 질이 나쁜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서의 ‘進上’이나 실제의 모습을 뜻하는 ‘眞相’이 나를 찔러대는 것이다.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 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쓸쓸하구나, 진상이여!

 

이 구절에 와서는 이미 반백(!)을 넘어 흰머리 가득한 이로서 덧붙일 말도 없는 진상 그 자체다. 한치라도 괜찮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어떤 이의 것이 아니고  “노비 같은 기색과 태도로 다만 먼지 털고 비질만 할 뿐”,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일도 없다는 끝자락의 몇몇 대목은 나라는 進上에게 결단코 어울리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탄식만이 내게 합당하여 그의 시처럼 녹여낼 길 없으니 낡아도 홀로 벼려진 검이 아닌 ‘le fusil rouillé(녹슨 총+)’에게는 울음도 없다. “녹슨 총보다 더 멋진 것은 없어요, 그리고 그건 이제 결코 소용없을 거예요”라던 앙리꼬 마시아스의 노래가 가을 바람처럼 이하의 마지막 말처럼 스산하게 들려올 뿐.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능가경은 책상머리에 쌓아 두고
초사도 손에서 놓지 못하네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 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쓸쓸하구나, 진상(陳述聖)이여!
베옷 입고 김매며 제사의 예를 익히고
오묘한 요순의 글을 배웠거늘
사람들은 낡은 문장이라 나무라네
사립문엔 수레바퀴 자국 얼어붙어 있고
해 기울면 느릅나무 그림자만 앙상한데
이 황혼에 그대가 날 찾아왔으니
곧은 절개 지키려다 젊음이 주름지겠네
오천 길 태화산처럼
땅을 가르고 우뚝 솟은 그대
주변에 겨눌 만한 것 하나 없이
단번에 치솟아 견우성과 북두칠성을 찌르거늘
벼슬아치들이 그대를 말하지 않는다 해도
어찌 내 입까지 막을 수 있으랴
나도 태화산 같은 그대를 본받아
책상다리 하고 앉아 한낮을 바라보네
서리 맞으면 잡목 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눈보라 치는 재단을 지키면서
검은 끈에 관인(官印)을 차고 있다 하나
노비 같은 기색과 태도로
다만 먼지 털고 비질만 할 뿐이네
하늘의 눈은 언제 열려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것인가

 

 

진상에게 드림 / 이하

 

 

/2017. 10. 19.

+열여섯일 적에 <검지의 꿈>이란 제목으로 ‘녹슨 총’에 관해 쓴 적이 있다. 녹슨 총을 붙들고 운다던 나는 역시나 노인이었던 듯.

(치정)살인의 추억

“치정살인”이란 단어는 내가 썼던 그 노래에 대한 가장 간략한 정의였다. 본인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래도록 연결이 끊어진 채인 그가 플로라를 알게 된 것은 레코드판에 바늘을 올리던 내 손끝에서였다.

그런데 이 단어를 친구의 아이디로 들어간 고등학교 동창 ‘밴드’에서 보게 되리란 생각은 정말 못했다. (현재 내 폰에는 ‘밴드’도 ‘페이스북’도 없다. ‘카톡’을 쓸 일도 없다.) lily of the west 만큼이나 씁쓸한 느낌이었다.

1999년 7월 25일, 나는 그 글을 썼고, 더 오래전 “천리안” 어딘가에도 썼었다. 그 친구가 나인줄 모르는 내가 거기 있었고 ‘이작자’가 나인줄 모르는 그 친구도 거기 있었다.

비슷한 무렵이었다. 안부와 함께 조금 냉소적인 메일을 그에게 보냈더니(메일 주소가 그 친구 아내의 아이디로 되어 있어서였는지) 누군지 모르지만 스토커짓 계속하면 신고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던 친구. 그래서 더 냉소적인 답을 쓰면서 나라는 걸 알렸더니 좀 씁쓸해 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메일을 보낸 것은 안부를 묻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무엇이 될지 모를 “이작자 여인숙”이 나의 숨겨진 ‘유로파’이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아써 클락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시리즈에 나오는 절대 착륙하지 말라던 유로파 말이다. 소설 속에서처럼 ‘불시착’이라면 어쩔 수도 없지만. 그가 유로파를 방문했는지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2006년의 어느 봄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를 잠깐 만났다. 나의 한심함에 일조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싶었다. 하염없이 걸어 내려가다 어느 순간…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처럼 쥴리아처럼 군중 속에서 슬그머니 멀어져간 이래 지금까지 그 친구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한 두 해 전 어렵사리 핸드폰 번호를 찾아내긴 했으나 나는 여태 그 11자리의 숫자를 돌이킬 수 없는 추억처럼 간직해왔을 뿐이다.

flora나 또는 flora의 애인을 죽여버린 노래속의 주인공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스토리에도 뭔가 ‘치정살인’ 같은 면이 있는 것도 같다. 플로라 때문에 살인이 난 것은 물론 아니었으나 나라는 인간, (심히 덜떨어진 시의 형태로) 살아 있는 그의 부고장도 썼던 사람이었으니……

 

 

+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면 플로라였거나 아니면 나였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면 오늘의 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죽은 주인공이 꾸는 뒤죽박죽의 꿈 같은 것일 게다.

 

 

/2017. 10. 11. 풀리

 

전전전전

세월따라 노래따라인지 방향만
바뀌어 교묘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에 귀를 기울인다 잔잔잔잔
하면 떠오르는 운명
느린 듯 장중하게 어쩌면 음침하게 잔잔잔잔
그리고 나의 어이없는
운명 같은 전전전전 반추는
울증의 전조라는데 전전전전
앞전은 뒷전으로 밀린 채 오직 앞전으로만 가는 운명
씹고 또 씹어
누군가의 죄 대신 십자가 대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씹어대는
전전전전
가려도 가려도 절로 나올 판인데 매일처럼 틀어대는
내일처럼 즐거이 털어대는
나의,
그리고 뻔하고 뻔한 우리들의
지난 이야기
뱉아내는 법도 토해내는 법도 결단코
없는 오늘과 내일의 지난 이야기

굿모닝 베트남

늦은 아침 사무실 와서 자리에 앉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커피 타는 일입니다. 설탕 넣지 않은 라떼 한 잔 마시고 나와 달달함이 간절해지는 시간, 웬지 수사의 아침 같은 드립커피보다도 공장 생산 가격으로 판매하는 200개들이 커피믹스보다도 두툼한 봉지에 쌓인 정체불명의 베트남 커피가 제일 생각납니다. 이제 막 볶아낸 듯한 커피의 향이 과할 만큼이지만 그게 진짜가 아닌 ‘香’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요. 너무 짙은 달달함이 느끼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그게 필요할 때도 있지요. 어쩌면 그건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같습니다. 밝게 빛나는 축복받은 낮, 캄캄하고 신성한 밤+ ㅡ 이 얼마나 달짝지근한 세상의 맛인가요. 무엇이 진짜인지 그 무엇이 香인지 잘 모르지만 포화로 얼룩진 마음 저 건너편의 굿모닝 베트남, 아득한 무지개 너머 어떤 이가 살고 있다고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왓 어 원더풀 월드입니다.

 

/2017. 9. 21.

 

+
what a wonderful world 가사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