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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estless wind inside a

달리 들을 길이라곤 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부터 이 노래는 이상하게 귀에 익은 느낌이었다. 라디오가 거의 유일한 채널이었던 시대였지만 그래서 귀에 익은 것이 아니라 기시감, 아니 ‘기청감(déjà entendu)’을 불러일으켰고 묘하게도 그것은 돌아갈 길 없는 시간 또는 장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오케스트레이션이 들어간 <let it be> 버전도 좋았지만 ‘세계 야생동물 기금’에의 기부를 위해 만들어진 앨범에 수록된 버전을 더 자주 듣곤 했었다. 새 소리와 더불어 스피커 채널을 옮겨가며 들리는 파도 소리인지 날개짓인지(아마도 새들의 날개짓인듯) 조금 조악하게 들리는 효과음이 나는 오히려 좋았다. 이펙트가 들어간 일렉트릭 기타와 시타, 탐부라……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노래 가운데 하나이고 가사는 한편의 환상적인 시(endless rain into a paper cup!) 같았다.

 

 


/beatles ballads

 

‘야생동물 기금’ 버전은 beatles ballads라는 제목의 컴필레이션 앨범(lp로 갖고 있는 이 앨범 재킷을 생각하니 아련한 느낌이 들어 한번 찾아봤다)에도 수록되어 있었고 <past masters>에도 들어 있다. 어릴 때도 그리 추측했었지만 예상대로 ‘기금 버전’은 원래의 녹음을 속도를 올려 조를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의 제목은 여전히 미완인 채 손을 놓고 있는 내 어떤 이야기의 제목에도 변용되어 포함되어 있다.

몹시도 캄캄했던 지난 밤,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가 희망일지 신념일지 고통일지 탄식일지 알지 못한 채 이 노래 듣던 시절이 저리도록 그리워졌다. 받을 길도 전할 길도 없는 숱한 사연을 싣고 우주의 저 끝으로부터 이 노래가 다시 내게로 왔다.

 

 

 

 


/no one’s gonna change our world
(world wildlife fund를 위해 across the universe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던 앨범이다.)

 

 

그 어떤 시도

아마 1987년 12월이었을 것이다.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민가를 만날 수 있는 깊은 산골 호젓한 숲속을 홀로 거닐었다. 담배 연기 가득했던 가슴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풀려났고 온통 눈덮인 개울가 바위 아래 고드름을 떼어먹으며 즐거웠다. 얕은 숲 사이 어딘가 잠깐의 봄날인양 눈도 쌓이지 않은 공터가 나는 아까웠다. 꽃과 같은 삶과 꽃일 수 없는 삶과의 갈등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여기 두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다. 겨울산 추위 속에 몸 숨기고 몸 드러내었으면 싶었다. 아득한 시간 너머 돌아온 곳, 12월과 겨울에 관한 혹독한 시를 읽고 싶었다. 내 마음 같은 시를 찾아 한 시간은 족히 헤매었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글자들은 두서없이 흩어져버렸다. 헒과 菌과 悲와 哀와 愛 그 무엇도 엮지 못한 채 흘려보낸 창공++ 아득히 저 아래 인적 끊긴 얕은 숲을 다시 거닐고 있다. 봄날처럼 따사로운 자리 대신 눈빛 물든 공터가 나는 또 아까웠다. 속 트이는 맑은 공기도 수정 고드름도 없는 외길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공터, 둘이 아니어도 몸 숨긴 채 잠시 아주 아주 잠시 누워보고 싶었다. 2017년 12월이었다.

 

 

+
한하운
++
네 헒과 균과 비(悲)와 애(哀)와 애(愛)를 엮어
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 보고파진다/한하운

 

 

/2017. 12. 25.

the analogues’ sgt. pepper

<아날로그>는 세상에 널린 비틀즈 연주 밴드 가운데 하나다.
네덜란드 출신 다섯명의 뮤지션이 만들어내는 연주는
단순한 흉내내기를 넘어 나름 진지하다.
이들은 특히 비틀즈 후기의 스튜디오 앨범들을 라이브로 들려주고 있는데
가능한 한 완벽한 재현을 위해 멜로트론을 비롯한 옛 시절의 악기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라이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원곡에 꽤 충실하다.
이들은 sgt.pepper 50주년(1967)을 기념하여 이 앨범 전체를 라이브로 공연했고
이제는 white album을 진행하고 있다.
a day in the life를 들은지는 정말 오래 되었고 안들은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론리 하트인지 브로큰 하트인지 이 노래의 어떤 서글픔이 요즘 내 어떤 느낌인양
창가 바라보며 옛사랑 같은 노랠 다시 듣고 또 들었다.
across the universe, 거의 1분에 가까워 참아내기 어려웠던 여운은……

 

 


a day in the life / analogues

the analogues’ sgt. pepper

<아날로그>는 세상에 널린 비틀즈 연주 밴드 가운데 하나다.
네덜란드 출신 다섯명의 뮤지션이 만들어내는 연주는
단순한 흉내내기를 넘어 나름 진지하다.
이들은 특히 비틀즈 후기의 스튜디오 앨범들을 라이브로 들려주고 있는데
가능한 한 완벽한 재현을 위해 멜로트론을 비롯한 옛 시절의 악기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라이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원곡에 꽤 충실하다.
이들은 sgt.pepper 50주년(1967)을 기념하여 이 앨범 전체를 라이브로 공연했고
이제는 white album을 진행하고 있다.
a day in the life를 들은지는 정말 오래 되었고 안들은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론리 하트인지 브로큰 하트인지 이 노래의 어떤 서글픔이 요즘 내 어떤 느낌인양
창가 바라보며 옛사랑 같은 노랠 다시 듣고 또 들었다.
across the universe, 거의 1분에 가까워 참아내기 어려웠던 여운은……

 

 


a day in the life / analogues

 

 

끝에서 끝까지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쉽사리 떨쳐내지 못할 현실이라는 이름의 일정치 못한 중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나이라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적도를 기준으로 지구는 소리보다도 빠른 초속 500m,
시속 1600km 속도로 자전하면서 하루라는 이름의 24시간을 보내고
초속 30km의 속도로 9억 5천만km에 달하는 거리를 태양을 따라 돈다.
우리는 그것을 1년이라 부른다.
태양계는 또 은하계의 중심을 초점으로 초속 200km의 속도로
2억 3천만년에 한번 일회전을 한다.
우리가 속한 은하는 또 초속 600km의 속도로……

 

끝에서 끝까지
그 달팽이
쏜살 위를 기어
기어코 12월

 

 

/2017. 12. 13.

 

 

+
이광식의 천문학+ 참조.

 

분실과 탕진, a lottery life

해마다 연말이면 어쩌다 생각나는 노래, 며칠 전 차안에서 우연히 lottery song을 들었다. 그래, 이런 사랑스런 노래가 있었지, 그리고 이런 달콤함을 꿈꾸던 때가 있었지……

살아오면서 복권 사본 적이 몇번이나 있었는가 모르겠다. 그런 종류의 운이 내게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내게 오리라 기대해본 적도 없다.

오래 전의 일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중년의 부부가 올라오더니 느닷없이 숫자가 적힌 종이쪽지를 하나씩 나눠줬다. 그러더니 대뜸 번호를 셋 불렀는데 내가 갖고 있는 번호도 있었다. 당첨된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판매하는 고급 시계를 아주 저렴하게 드린다는 이야기였다. 힘차게 번쩍 손을 들라던 독려의 말투가 좀 우스꽝스럽게 들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들에게 번호를 받은 모든 사람이 당첨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당첨은 군대서 훈련받을 때도 있었다. 잠시 쉬며 담배를 피우고선 꽁초 버리러 가는 당번을 뽑기 위해 십수명과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내가 걸렸다는 것, 단 한번만 이겨도 괜찮았는데 결국 내가 담배꽁초를 버리게 되었다는 것, 그런게 내가 가진 하찮은 ‘당첨의 기억’일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다지 애쓴 일도 없는 인생에  몇번의 당첨 복권(이 표현이 지극히 온당치 않음을 알지만 내 하찮음을 적시하는데 있어서는 그 반대로 매우 합당하다)이 내게 있었다. 백만에 하나인지 일억에 하나일지 알 길 없지만 정말 그랬다. 그것이 내 손에 쥐어졌음에도 뭔지 모르기도 했고 무한정 샘솟을 듯 닥치는대로 써버리기도 했다. 불태우고 찢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아마 나는 비슷한 어리석은 일을 몇번은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복에 대한 권리는 알게 모르게 실효되었고 이제는 더이상 뽑을 리도 뽑힐 리도 없다. 준비되지 않은 이의 복권은 재앙과 비슷한 법이어서 이제는 짧았던 황금의 시절 대신 상실감만 안고 있을 뿐 모두가 묻혀버린 오래 전의 일이다.

아시다시피 보시다시피 결국은 올해도 꽝, 복에 대해 그다지 자격도 권리도 없음에 아무 것도 갖지 못했음에 궤변처럼, 또는 성현들 말씀처럼, 또는 위로인양 감사하며 결코 복권될 수 없는 내 삶의 잃어버린 몇몇 복권을 추억하며

“thanks a lot…to……”

 

 

the lottery song / harry nillsson (/srs.)

닭가슴살 새가슴살

발라낼 뼈라도 있긴 있었을까
다만 콩닥대며 짧은 꿈 잠시 꾸었을 뿐
마음의 지붕에조차 올라본 적은 없었다
추려낼 꿈이라도 어디 있긴 있었을까
온갖 두려움과 낯 뜨거움과 부끄러움의 이름 너머
숨다 달아나다 잠시 퍼덕였을 뿐
이 하루 겨우 재울 양념에 절어서 사는
날개 없는 자의 걸음 같은 가슴살
이내 하루살

 
/2006. 7. 19.  0:47

 

 

 

+
스팸 피해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화이트룸” 살펴보다
11년 전에 쓴 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두 장소

내가 그 책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마 15, 6년 쯤 전이었을 것이다. 어디로부터 내게 왔는지 모를 <허구들>과 보르헤스 관련 몇몇 서적의 역자 주석과 해설에서 숱하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번역본은 없었다. 한참 뒤에 읽게 된 보르헤스의 에세이집을 무척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그 책이었다. 출판사는 보다 구매력 있는 제목을 원했겠지만 나는 바뀐 그 제목이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하지만 제목이 무엇이라 붙었던들 그 책, <또다른 심문 otras inquisiciones>은 내게 의미있는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노래 한 곡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브라질 음악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을 다방면으로 확장시켜준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사실을 말하자면 보르헤스의 상당수 에세이가 내게 그랬다. 바벨의 도서관 해제도 물론.)

아무튼 그 책의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이란 에세이에서 나는 레옹 블루아(이전의 책에는 영어식 표기로 ‘레온 블로이’라 되어 있었다)를 다시 보았고 로드 던세이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도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는 두 작가와 그들의 이야기가 각기 수록되어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이 정착한 마을 ‘몽쥐모’를 떠날 수 없는 부부의 기구한 삶이 있었고, 그와 반대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전설의 도시 ‘카르카손’을 향한 원정대의 허망한 꿈을 다룬 던세이니의 이야기도 있었다.

블루아의 단편에는 일정 부분 블랙 코메디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던세이니의 경우는 중세 무용담의 형식에 삶 자체에 대한 은유를 담담한 어조로 담아내었다. 던세이니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이가 보내온 편지에 인용된 출처불명의 한 줄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은 결코 카르카손에 도달하지 못했다”를 통해 이 단편을 썼다고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날 수 없는 곳과 수많은 세월을 진군했음에도 닿지 못하는 곳, 내 생각에 삶은 그 두 장소 모두인 것 같았고 나 역시 그 두 곳을 오가며 절망하고 희망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몽쥐모와 카르카손은 결국 같은 공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를 일이다.

 

but he, he never came to carcassonne.

 

 

 

/2017. 11. 23.

a single man, 확실한 內傷

그렇지 않았으면 찾지 않았을 것이다. <녹터널 애니멀즈>의 불편함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 싱글 맨>을 통해 감독에 대한 느낌에 극적인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뜻밖이었다.

원작자와 감독이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퀴어 영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퀴어 영화겠지만 성적인 정체성보다는 상실과 복원이라는 관점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가 성적인 소수자를 다루고 있음에도 부담스런 느낌은 별로 없었고 오직 상실에만 공감하며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 ㅡ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실감이라는 점에서는 내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깨어난 아침, 침대 위의 만년필에서 잉크가 새어 하얀 시트가 검게 물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손이 그쪽으로 가지만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상태고 어떻게 할 기력도 없다. 잉크 묻은 손으로 하여 자기 입술에 잉크가 묻어도 알지 못한다…… 정말 그런 것이었다. 나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이 장면이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여기 링크했다가 삭제했다.)

그리고 싱글 맨이란 이름을 따라 몇몇 ‘맨’을 떠올렸다.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뜻하지 않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제일 먼저 <시리어스 맨>이 생각났고, 다시 날자꾸나 하던 <버드맨>과 거기 없었다던 엉뚱한 ‘그 남자’ 이발사도 어른거렸다. 현실이라면 ‘시리어스 맨’이겠지만 상실감에 관해서라면 나로선 ‘어 싱글 맨’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거나 꿈이거나 ‘그’이거나 ‘그녀’이거나 도무지 복원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귀퉁이, 또는 후미진 (영화관의) 자리에 본능적으로 눈이 가는 사람으로서 <a single man>이 a single man에게만 집중되어 있음은 조금 안타까웠다. 그것은 ‘다크 시티’의 마지막에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버린 형사(윌리엄 허트)나 ‘오픈 유어 아이즈’의 빌딩 옥상에서 자신이 정체성에 충격을 받는 정신과 의사에 대해 내가 가졌던 묘한 연민과 비슷한 무엇이다.

 

 

짧고 인위적인 조우였고, 16년을 함께 한 짐(매튜 구드)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헐리우드의 꿈을 안고 마드리드에서 왔다가 처량한 신세가 된 카를로스(존 코르타자레나)를 냉정히 보낼 때 그 청년 또한 a single man이었고(나는 느끼한 이 청년이 외면당한 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결국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 팔코너 교수의 생각도 못한 죽음을 목격하게 될 케니(니콜라스 홀트)에겐 이 무슨 캄캄한 절벽이었을까 싶다. 끝내 콜린 퍼스의 사랑을 얻지 못한 찰리(쥴리안 무어) 역시 a single (wo)man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內傷'(또는 外傷!)을 가진 주인공이었지만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단장을 했으나 “과거에 사는 것이 나의 미래야”라고 말하는 그녀를 비롯한 그의 가까운 모두가 더하고 덜할 수 없는 a single man으로 보였다. 혼자라는 것 자체가 확실한 內傷이니 거기 물론 나도 빠질 수 없겠고.

그래서 <녹터널 애니멀즈>의 경우와는 정반대, 특별히 대단한 영화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a single man의 심사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읽는 이가 봤으면 싶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아픔 ㅡ 어쩌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 거기 있을지도.

 

 

/2017. 11. 22.

 

 

+개인적인 취향 내지 결함이겠지만 유능한 디자이너이기도 한 감독과 스타일리쉬한 콜린 퍼스의 이미지로 하여 너무 깔끔한 것이 오히려 영화에의 몰입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