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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it’s still for you and me ◎

보르헤스의 트레저 아일랜드 ㅡ 최근에 구입한 스티븐슨의 단편집 첫 페이지를 펼치니 그가 쓴 헌정사가 있었다.(정확히 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에 수록된 헌정사다.) 사촌이었던 캐서린 드 마토스에게 쓴 긴 편지시의 일부라고 하는데 인상적인 헌정사라는 점에서 칼 세이건을 생각나게 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우리 인연이 끊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군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바람 불던 히스 황야의 아이들이지요.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금작화가 북쪽 지방에서 아름답게
흩날리는 건 여전히 당신과 나를 위해서지요.
/캐서린 드 마토스(Katharine de Mattos)에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억겁의 시공간에서의 드라마틱한 조우는 아니었지만 스티븐슨의 두 줄은 당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섬세함과 절절함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끊어진 만남이 미래같은 과거로 하여 다시 이어짐을 바라보며 함께 함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의 헌정사는 광대한 우주와 무한의 시간 사이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의 기적 같은 기쁨을 헤아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단절되어버린 현실의 인연이그 옛날처럼 함께 이어져 있음을 흩날리는 금작화에서 일러주는 스티븐슨의 문장은 그 소소함과 위태로움으로 하여 더 절절하다.

 

 

o it's still for you and me ◎

보르헤스의 트레저 아일랜드 ㅡ 최근에 구입한 스티븐슨의 단편집 첫 페이지를 펼치니 그가 쓴 헌정사가 있었다.(정확히 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에 수록된 헌정사다.) 사촌이었던 캐서린 드 마토스에게 쓴 긴 편지시의 일부라고 하는데 인상적인 헌정사라는 점에서 칼 세이건을 생각나게 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우리 인연이 끊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군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바람 불던 히스 황야의 아이들이지요.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금작화가 북쪽 지방에서 아름답게
흩날리는 건 여전히 당신과 나를 위해서지요.
/캐서린 드 마토스(katharine de mattos)에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억겁의 시공간에서의 드라마틱한 조우는 아니었지만 스티븐슨의 두 줄은 당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섬세함과 절절함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끊어진 만남이 미래같은 과거로 하여 다시 이어짐을 바라보며 함께 함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의 헌정사는 광대한 우주와 무한의 시간 사이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의 기적 같은 기쁨을 헤아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단절되어버린 현실의 인연이그 옛날처럼 함께 이어져 있음을 흩날리는 금작화에서 일러주는 스티븐슨의 문장은 그 소소함과 위태로움으로 하여 더 절절하다.
 
 

실크로드 팬터시

열아홉살 무렵 당시 유명했던 어떤 소설가와 기자가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발간한 에세이집을 읽은 적이 있다. 이란과 터키에 대해 나름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느낌들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앵커맨도 시를 읊는다는 이야기와 딱딱한 설탕을 녹여가며 마시는 차, 그리고 우스쿠다라가 생각난다.

또 일본에서 만들어진 실크로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기타로의 애잔한 테마와 방송이 끝날 때마다 나오던 짙은 푸른빛(그저 내 상상속의 기억일 뿐이라는 것은 안다)의 히잡을 둘러쓴 어떤 여인의 눈빛이었다. 실크로드의 장면들은 거의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아련한 신쎄사이저 연주와 히잡 속의 눈빛만이 실크로드의 환영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러 터키와 이란의 노래를 듣다 보니 그 눈빛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화면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조금 수고를 해서 찾아보니 골쉬프테 파라하니(golshifteh farahani)라는 이름을 지닌 이란 출신의 배우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좀 좋아하는 자무시 감독의 어떤 영화에 살짝 철없는(?) 아내로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sen hiç mi bahar görmedin, 향신료가 과한 이국의 음식처럼 과잉된 느낌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이국의 미각이려니 한다. 센 히치 미 바할 괴어미딘 ㅡ

당신은 봄을 보았나요?

 

/srs.

그래서 보옥의 꿈을

가보옥이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를 보르헤스에서 읽은 적 있다. 보옥이 (꿈에) 자신의 집과 흡사한 집에 들어가 비슷한 여인들을 만나고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자신을 만나고 깨어나는 이야기인데 <홍루몽>을 읽은 적이 없어 어느 대목에서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천일야화의 사연이 담긴, 그러니까 세헤라자데가 샤 리아르에게 자신들의 사연을 남 이야기처럼 하는 것이 1001일 가운데 어느 밤이었는지 찾아냈듯이 보옥의 꿈을 찾아보고는 싶다.

가보옥의 꿈에 관한 이야기는 꿈이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이 다시 꿈을 만들고 깨어나는 자기조직적인 구조다. 에셔나 천일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비일상적인 형태의 쳇바퀴라는 점에서, 그리고 비현실적 상황에 어떤 완벽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매력적이다.

천일야화의 “꿈을 꾼 두 사람의 이야기”(삼백오십일번째 밤) 또한 그런 면으로는 아주 완벽하다. 꿈이 또 다른 꿈이나 현실을 초래하고 현실이 다른 현실 또는 꿈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러셀이 어릴 적에 꾸었다는 꿈처럼 스스로 당위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뒷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라고 적힌 종이를 뒤집었더니 “뒷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본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코엘료와 그의 지지자들에겐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연금술사> 또한 “꿈을 꾼 두 사람의 이야기”를 365일의 꿈으로 늘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한편 그런 꿈에 대한 관심, 심지어는 꿈 그 자체조차도 시간과 공간, 세월과 나이와 형편에 따라 제한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구속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꿈이 현실을 부르고 현실이 꿈을 인도하는 듯한 보옥의 꿈을 꾼지 너무도 오래이고 그래서 지금도 보옥의 꿈을 꾼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기도 하고 그것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기에.

 

꿈을 꾼다는 그 여인을 꿈꾸었네
그녀가 나와 함께 꿈꾸고 있다는 꿈을 꾸었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2018. 5. 7.

내가 만일

무엇에 관한 노래인지 처음엔 잘 몰랐다. 그저 에프랏 벤 주르 efrat ben zur의 비명처럼 들리는 고음에 묘하게 끌렸을 뿐이다. 어떤 고통, 무슨 몸부림이 거기 있을까 상상하면서. 그녀가 노래하는 괴로움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었기에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에밀리 디킨슨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로빈이라는 앨범 커버를 보는 순간 조금 알 수는 있었다.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이 그 노래였다.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에밀리 디킨슨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by emily dickinson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거나
또는 한 괴로움을 달래거나
또는 할딱거리는 로빈새 한 마리를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y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into his nest again,
i shall not live in vain.

 

그러니까 이 노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내가 만일>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 자신의 기대와도 달리 가사를 알고 나니 내가 상상했던 많은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노래의  고음 또한 먼 산울림처럼 아득해졌다.  ‘내가 만일'(!) 그녀였다면, 그리고 디킨슨의 시를 떠올린다면 차라리 조용히 읊조리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가짐 또는 행동이 필요할 뿐, 그렇게 높은 목소리로 대신할 합당한 이유를 찾기가 나로선 쉽지 않았다. 때로 온전한 지식이 상상을 훼손시키곤 하는데, 이 노래의 경우가 그랬다. 옛시절의 디스코처럼, fly robin fly를 떠올리면서.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여전히 이 노래는 그 자체로 인상적이고 한갓되이 헛되이 살아온 나는 때로 디킨슨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그녀의 비명소리에 동조하곤 한다.

 

 

/2018. 4. 22.

heitor dos prazeres

슬프기 보다는 행복한 게 좋아
행복한 건 가장 좋은 일이고
그건 네 가슴 속의 빛과 같지
하지만 아름다운 쌈바를 만들려면
많은 슬픔이 필요하지
많은 슬픔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쌈바는 만들어질 수가 없다네
/축복의 쌈바,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 이상, 브라질 음악을 미친 듯이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 세련되고 멋진 음악들이 어떻게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것일까 너무도 궁금하였다. 아리 바호주, 노엘 호자, 이스마엘 씰바, 동가, 넬손 까바낑요, 까똘라, 씨루 몽떼이루……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브라질 음악 이전에는 대체 어떤 음악들이 있었을까에 관해 호기심을 보이다 나는 옛 쌈바 가수들의 이름까지 들춰보게 되었고 거기 낯선 이름 하나가 더 있었다. 에이또르 도스 쁘라제레스다.

1898년 브라질의 히우 지 자네이루에서 태어나 1966년에 세상을 떠난 에이또르 도스 쁘라제레스는 브라질의 쌈비스따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중남미를 떠올리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라틴풍의 컬러풀한 그림들을 그린 빼어난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브라질 흑인들의 삶과 빈민가의 모습들을 비교적 밝은 분위기로 표현해내려 애썼다. 아꽈렐라 두 브라질(브라질의 수채화)를 작곡한 사람은 아리 바호주이지만 그는 브라질을 그림으로 남긴 아꽈렐라 두 브라질 그 자체였다. 나는 푸투마요 씨리즈의 커버를 장식하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그의 화풍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festa de são joão (성요한 축제)

 


morro da mangueira(망게이라 언덕), 1965.

 

 
sem título(무제)

 


sambistas

sem título, 1960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마마에 오쑴(mamãe oxum)인데 1955년에 발표된 이 노래를 듣노라면 오래된 재즈곡을 들을 때처럼 내가 속한 적 없는 세상, 잡음 가득한 흑백의 시대에 대해 저리도록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가운데 나는 ‘유성기’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 소리를 따라 하염없이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도무지 잡을 수 없는 그 아련한 느낌은 거의 고통에 가까운 것 같다.

오쑴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브라질 토착종교의(어떤 면에서 절에 있는 산신각이나 용왕각의 경우처럼 그들의 주된 종교인 가톨릭과 자연스레 융화된) 신앙의 주요한 모티브(여신)으로 번개신 샹고의 아내이며 나이지리아의 오순(osun) 강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에이또르 도스 쁘라제레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바덴 포웰의 위대한 노래로부터였다. 그것은 그 노래 제목에서처럼 내게 있어 작은 축복이었다.

 

 

+
마마에 오쑴은 이 페이지의 오른쪽 위에 있는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아래 링크로는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vai saudade, heitor dos prazeres, 1965.

 

 

/2018. 5. 2.

 

 

 

+
네이버가 외부 프로그램을 통한 글쓰기에 제동을 걸었다.
예전처럼 워드프레스에서 쓰면 블로그에 글이 올릴 수는 있는데
내용을 변경한다고 하더라도 워드프레스의 수정본으로 갱신시켜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역시나 네이버다운 결정이다.
그래서 글쓰기 연동을 제거하고 수동으로
추후에 선별적으로 업데이트 하는 방식을 택해야 할지 생각중이다.
아마도 그래야 할 듯 싶다.

내 여덟 살에게 ◎

1.
여름엔 삶은 옥수수도 가끔 사고 겨울엔 어묵을 사가곤 하는
길모퉁이 부식가게, 그녀가 등 돌린 채 앉아 있다.
바깥은 이토록 봄날인데 닫힌 창문 너머로 일없이 앉아 있는 그녀의
잔기침 소리가 들린다.
김장이든 부식이든 일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도 즐거이 움직일 분이건만
이렇게 환한 아침 어둑한 실내에서 고개 숙이고 있다.

 

2.
유치원 아이들이 손잡고 봄나들이를 간다.
세상에 유치원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길바닥에 붙어 있는 이름 적힌 은빛 스티커를 보다
내 일곱 여덟 살 시절을 잠깐 떠올렸다.
그때 울고 웃고 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생각하면 마음 쓰리지만
한편으론 그 덧없음이 얼마나 눈부시고 가슴 뭉클한 일이었는지
가능하다면 이 모두를 내 여덟 살에게 전하고 싶다.

 

3.
사무실 와서 도시락을 꺼낸다. 오늘은 회덮밥이다.
생선 종류를 들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따로 가져온 밥에 ‘칠분도쌀’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예전에 내가 떼낸 시래기밥, 견과류죽, 또 시래기밥 포스트잇이
냉장고 옆에 몇장 남아 있다.
이렇게 환한 봄날 아침 고개 숙인 채 앉은
수많은 잘못들의 총합인 내가
스물여덟 살에게, 모든 여덟 살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 가운데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를 작은 부분들이다.

 

 

봄, 테스트

 

오늘 나오다 프리우스도 옆에 있고 해서 폰으로 한장 찍어봤다.
저 앞의 큰길 벚꽃이 멋진데 이곳이 한산해서 나는 오히려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좀 촌스러울지 모르겠지만
거의 30년 이상 이 아파트의 벽 또한 벚꽃 같은 연분홍 빛깔이었다!)
퇴근길에는 다른 이의 사진에 행인1, 행인2로 너무 많이 찍히는 것 같아
좀 불편하다.

모친이 주로 사용하고 계시는 프리우스는
외관에 흠집들이 좀 있어도 별 문제는 없는 것 같고
10.5만km 정도 시점에 브레이크 패드만 한번 교체했을 뿐이다.
조만간의 점검 때에는 점화플러그를 비롯하여 추가적으로 교체해야 할 소모품들이
좀 있을 듯 싶다.

신기하게도 어제는 나의 랜덤 아이팟에서 김정미의 노래가 나왔다.
봄, 그리고 햇님.
그리고 봄이면 생각나는 씨꾸 부아르끼 지 올란다의 처연한 옛노래도.

(이 포스트는 폰에서 올려 컴으로 수정했다.)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

el árbol que tú olvidaste
siempre se acuerda de ti,
y le pregunta a la noche
si serás o no feliz.

 

유팡키라는 성을 지닌 그 이름을 듣기 수십년 전부터
아타왈파는 내게 있어 가슴에 맺혀 있는 이름입니다.
오래도록 중남미의 역사에 매혹되었던 내게 있어 아타왈파는 가장 드라마틱한 상징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왕조가 몇대 이어지긴 했으나 그는 스페인에 정복당한 잉카의 마지막 왕이었지요.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인으로 죽어 부활을 꿈꾸었던 ‘the last inca’ 말입니다.
(그 무렵의 나는 잉카와 아즈테카의 이름없는 백성인양
세상에서 가장 싫은 나라가 스페인이었고 피사로와 코르테스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문명의 전달자, 또는 문명 그 자체였던 콘 티키 비라코차가 떠나간 자리,
콘도르의 꿈을 남긴 채 아타왈파가 날아가버린 그 땅에
엑토르 로베르또 차베로 아람부루(héctor roberto chavero aramburu)라는 긴 이름 대신
“먼 땅에서 와서 이야기하는(노래하는) 사람” ㅡ 아타왈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삶의 행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투박한 목소리와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기타 소리는
세상 무엇보다도 강렬한 악기가 되어 마음을 움직였지요.
당신이 그 나무일지 내가 잊혀진 나무일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그 나무에 잠깐 앉았다 날아가버린
“봄날의 작은 새”일지도 알 수 없지만
벚꽃이 활짝 핀 이 봄날에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 귀기울일 때 그의 노래는 보다 진실되게 들리고
나는 잊어버린 나무를 좀 더 잘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영 잃어버린 나무라고 할지라도요.
또 당신이 나라고 할지라도요.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는
늘 당신을 기억해요
당신이 행복한지 어떤지
밤에 묻지요……

 

 

 

/2018. 3. 28.

 

 

+
일부 잉카에게 ‘유빵끼(선조를 존경하는 사람)’라는 호칭이 붙어 있었지만
마지막 왕은 그냥 ‘아따왈빠’입니다.

/srs. 201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