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싱어송라이터 mohsen namjoo는 낮은 목소리와 찢어지는 고음이 교차하며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 면에서는 좀 예외적인 khat bekesh는 오래된 멕시코의 맘보-볼레로 송에서 완벽하게 흥을 도려낸 채 슬픈 템포로 노래하는 것이 의욕 다 달아나버린 요즘의 내 마음 같았다. 촌스런 분위기의 화면이지만 나는 남주가 자신의 세타(페르시아의 전통악기)를 히치하이킹 시켜버리고 돌아서는 장면에 깊이 공감하였다. 자유의 기회로부터 쓸쓸히 등을 돌리던 빠삐용의 드가처럼, 거꾸로 매달린 스패니쉬 퀘셔천 마크처럼, “끼엔 쎄라, 후 윌 잇 비?”.
내가 어렸을 때 병 속에 쪽지를 넣어서…
그 쪽지엔 내 이름과 주소를 적었지.
그런 다음 병을 바다에 던졌지.
그리고 그걸 누가 발견 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어.
어느 하루의 느낌을 적나라하게 말할 수 없으니 잠꼬대 같은 소리로 대신할 수 밖에 없는가 보다.
<침묵의 질주>를 처음 본 것은 어릴 적 흑백 텔레비젼을 통해서였다. 여전히 인상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엉성한 구성도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오늘 나는 외딴 우주의 작은 섬 같은 식물원 ㅡ ‘밸리 포지’에 있는 듯하다. 거기서 혼자만의 세계를 가꾸는 프리먼 로웰과 별로 다르지 않다.
(도입부의 우주선 모습, 프리먼 로웰이 밸리 포지에서 수확한 야채로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스탠리 엘린의 ‘애플비’처럼 자신이 싫어하는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누군가의 세상에 잡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질서바른 세계를 뭉개버리는 결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끝나지 않는 세계 말이다. 프리먼 로웰이 서투른 로봇들과 벌이던 카드게임 같은 짓을 계속하면서.
그리고 캄캄한 하늘을 드높이 선회하는 별과 닿지 못할 아득한 어딘가를 향해 하염없이 떠나가는 비행선의 꿈을 꾸었다. 사무엘 우리아의 노래가 비장하게 흘러나올 때 홀로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 했을지도 모르겠고, 그 반대일지도 알 수는 없었다.
(서두의 인용은 프리먼 로웰이 자폭을 결심한 후 로봇들에게 건넨 말 가운데 일부다. 그 대사는 어릴 적에도 뭔지 모르게 허무한 느낌을 들게 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새벽 잠이 깨었다. 창녕이었다. 불투명한 창문은 열어둔 탓에 바깥이 잘 보였고,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은 적당한 어둠 속에 감춰진 채 적막 속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잠시 마당을 바라보던 내 마음에 문득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꽤 좋아했던 노래, look at me였다.
한밤중에 듣는 그 노래는 사랑노래라기보다는 묘한 허무감을 내게 남기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 노래가 수록된 앨범 자켓을 좋아해서 책상 위에 액자 마냥 얹어두곤 했었다.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내 ‘삐삐’에도 그 노래가 흘렀다. 허리에 찬 삐삐에선 가끔 불이켜지고 진동이 울렸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이다.
가끔은 ‘3504’ 같은 메시지도 있었다. 그것은 조금 더 길어져 35가 몇번씩 이어지기도 했고 04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3535353504040404. 문자를 사용할 수 없는 기기이다보니 숫자로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언어와 곡조로 번역하자면 “love you forever and forever love you with all my heart”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허리에서 감지된 진동이 마음을 두드리곤 했다.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신호 자체가 어떤 연결인양 여기곤 했다. 그리고 잠깐 울렸던 메시지는 원주율처럼 끝없이 이어지며 나를 호출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속했던 세상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리, 또는 우리들은 제각각 다른 세상으로 발을 디뎠고 그곳에는 삐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호출하던 신호 또한 일방의 무한한 공간 너머로 어떤 해석도 불가능한 파편으로 흩어져버렸다. 노래는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있지만 듣지 않은지는 몇년이나 되었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지난 새벽 잠이 깨었다. 온갖 잡다한 것들이 어둠 속에 곱게 감춰진 마당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의 꿈이었다.
십수년 전 어느 가을 날이었다. 창가 시들한 허브 화분에 이름모를 벌레 한마리 천천히 날아 들었다. 가지가 아닌 화분 옆면에 매달린 듯 자리를 잡더니 그대로 멈추었다. 아주 작은 벌레는 아니었고 휴식이라도 취하는가 싶었는데 다음 날에 봤을 때도 꿈쩍 않는 것이 곤충은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특이한 모습에 나는 사진을 찍었고 묘한 모양새가 ‘좌탈’을 생각나게 해서 중의적인 의미에서 “어딘지 불법적인“이라는 제목을 붙였었다.(이제 찾아보니 2004년 10월이었다.)
어제는 종량제 쓰레기 봉투를 버리는 날이었다. 나름 절약하느라 비닐봉투를 눌러 담을 수 있는 쓰레기통을 사용하고 있는데 쓰레기통 두껑으로 누르는 방식이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두껑을 들고 입구까지 가득한 쓰레기를 누르려는 참에 보니 입구 안쪽에 손가락 한마디 만한 가느다란 벌레가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죽은 벌레인가 싶어 슬쩍 건드렸더니 느리지만 움직이는 것이었다. 쓰레기 봉투를 꺼내려면 먼저 쓰레기를 꽉꽉 눌러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벌레를 짓이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냥 두고 왔다.
오늘 사무실 나와서 보니 화장실 벽에 어제의 그 벌레가 붙어 있었다. 오래 전 화분에 날아와 앉았던 잿빛 곤충처럼 그냥 꼼짝않고 매달려 있었다. 건드리면 움직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아무 것도 합당한 것은 없고 그 무엇이 불법적인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퀘퀘한 그 세상에 매달려 있는 것이, 또는 편히 쉴 자리를 찾는 것이 그들 벌레의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이 어제 쓰레기를 버리지 못한 유일한 이유였다. 어떤 한 세월이 내게는 그런 하루였다.
1.친구가 에러났다고 가져온 외장하드를 좀 살펴봤다. 데이터 복구회사에 가서 문의를 했더니 상당한 고액이라 포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면으로 그다지 경험이 많지도 않은 내가 어찌어찌 수리에 성공하여 대부분의 에러가 해소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득불 하드의 내용들을 일부 체크하게 되었는데 나름 오타쿠 기질이 있는 친구라는 것, 새삼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친구가 적어준 폴더만 조심스레 카피를 하고 하드디스크의 문제 해결을 시도한 결과, 본의 아니게 110% 복원이 된 것이 실은 좀 난감하다. 그게 본래 존재했던 폴더인지 아니면 휴지통에 있던 것이 복구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 10%를 그대로 줘야 하는지 아니면 삭제하고 주는 것이 맞을지 잘 판단이 서지 않지만 대부분 다 복구되었다고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맞을 것도 같다.
2. 작년부터 올해까지 내 삶에 몇가지 파란이 있었다. 하나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내 잘못과 책임이 있기에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던 일련의 일들로 절망했고,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사건은 나를 힘빠지게 했다.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것들임에 두가지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하루 하루는 덧없고 기계적이다. 올해 여름 그 가운데 하나의 문제를 풀어보고자 나름 열심이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게 된 이후론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는대로 지내고 있다. 그저 하루를 땜질하고 있을 뿐, 2017년의 <the endless> 속 마을의 눈에 띄지 않는 한 모퉁이에 내가 살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대 있으니 나 또한 있고
그대 없으면 나도 또한 없음이라
말로 이루어진 사원을 꿈꾸었으나
有와 無를 모두 세우지 아니한다 했으니
쉽사리 발설했다 두고두고 후회하면서도
말하지 못해 형용할 수 없어 미칠 것 같은
바로 그것
3. “말할 수 없는 그것”을 쓸 때도 그랬지만 이제는 괴로움 마저 아득해진 것인 형용할 수 없어 미칠 것 같은 마음도 이젠 무디어져 무력감만 남았다. 그러니 “누구… 시온지……“와 비교한다면 극과 극 같은 차이를 느낀다. “오늘처럼 비루한……”을 쓰면서는 엉뚱한 상상 속에 헛된 다짐이라도 했으나 그 제목이 말해주는 합리화처럼 결국은 비루하게 끝이 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영영 달아나버린 당신, 어쩌면 영원토록 말할 수 없는 그것,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희미해질 즈음이면 말이다.
집안 행사로 모처럼 해운대를 다녀왔다. 평소 별로 갈 일 없고 그리 가고 싶은 곳도 아닌데 부페까지 다녀왔다. 이것저것 접시에 담다 보니 조금 이상하게 적힌 낯익은 단어가 있었다. 과카몰 새우요리인가 아무튼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과카몰레’를 그렇게 표기한 모양이었다.
평소 요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전혀 사람이라 과카몰레를 맛본 적은 없었고, ‘듣기만’ 했을 뿐이다. 여기서 듣기란 단어나 요리에 관해서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들었다는 말이다. 좋은 인상에 행복한 표정이 좀 지나쳐서 괜스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케빈 조핸슨(이 사람 이름은 왠지 영어식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의 노래로 그게 요리/소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과카몰레 또한 그 재료가 되는 아보카도(와카틀)와 토마토(토마틀)처럼 나와틀어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하며, 과카몰레를 잔뜩 얹은 삶은 새우는 꽤 맛있었다. 언젠가는 ‘(다녹은) 초콜렛/쇼콜라틀’까지가 소스의 재료가 되는 릴라 다운즈의 와하까 몰레도 맛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가녀린 달 한 조각을 제외하고는 밤바다에서 볼 것이라고는 너무도 생경하게 치솟아올라 있는 초고층 아파트뿐이었고, 부페서 채운 더부룩한 속보다 더 많은 우울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하게 즐겁고 화사한 분위기의 과카몰레는 limon과 sal의 지나친 상큼함과 지독한 씁쓸함이 내내 한켠에 함께 있었다. 우적우적 몰래 씹어삼킬 수밖에 없는 몰레, mi querida soledad!
거의 열흘이 넘도록 뭔지 모를 몸살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주 벌초 갔을 때도 그래서 내내 힘들었고 오늘까지 마찬가지다. 그 사이 몸살약도 이것저것 먹었고 오늘도 약이 필요한 것 같다. 나이 들어 보는 만화가 젊은 날의 느낌과 같을 수는 없지만 가라앉은 몸을 눕힌 채 대충 봤던 <너의 이름은>과 <초속 5센티미터>를 다시 봤다.
<너의 이름은>이 좀 더 드라마틱했지만 나는 <초속 5센티미터>의 첫번째 단편, 폭설 속에 하염없이 연착하는 기차 속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토오노 다카키의 심정이 어떤 이의 삶 전반에 걸친 어떤 느낌과 비슷했던 까닭이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다행이 모골라의 노래와 <초속 5센티미터>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 아래에 링크했다. 모골라는 1968년에 결성되어 40여년을 활동해온 터키 락 밴드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로 ‘(터키에 있는) 몽골리안’을 의미하며, 노래 ‘요룸 시닌레 yolum seninle’는 ‘너와 함께 이 길을’이란 뜻이다. 노래의 배경이 된 애니는 <초속 5센티미터>의 첫번째, ‘桜花抄 벚꽂 이야기’이다.
저녁 7시가 아닌 11시 15분 도착. 그것이 비극적이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대개의 현실처럼 토오노 다카키가 여자 친구(시노하라 아카리)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두의 인용은 그런 내 심사를 대신하는 대사였다.
그러고보니 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다르지만 그런 허탈함을 불러온 일이 있기는 했다. 여름방학때 고향에 있는 외가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누군가를 만난 것이다.(아이들의 놀림으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뒷모습, 그녀의 두갈래 땋은 머리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외가집에 있는 며칠 동안 그녀와 한 두번 따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초록색과 유치환의 깃발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우리는 어느 일요일 부산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그녀는 그날 오지 않았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날로부터 멀지 않았던 다른 일요일, 몰래 밀양으로 간 나는 그녀의 집까지 찾아갔으나……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잠깐 보았을 뿐,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운지난날의기억들이변한다모든것이변한다
/지주회시,이상
이 한줄은 그해 가을과 겨울 내 마음의 모든 것이었고 그래서 기차 속의 토오노군의 심정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세번째 단편에서 철로 너머 보이지 않는 그녀에 분개하는 청춘들의 소감은 그 기차처럼 나를 떠난지 오래, 애니메이션 속의 노래가 내겐 별로였지만 가사 한 줄은 생각난다. 이 길 함께 하지 못한 그 누구일지……
소리라도 달리 하고 싶어 스마트폰을 쓰면서는 내가 선택한 음악으로 알람도 하고 전화 오면 노래가 나오게 했다. 이런저런 곡들을 넣어서 썼지만 언제부터인가는 바뀐 적이 없다. 그 사이 폰은 달라졌어도 폰이 울리면 나오는 소리는 변한 것이 없다. 장 꼭또의 한 줄에서처럼 아스라히 들려오는 로이 하퍼의 노래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절절함은 그 노래가 결코 예사로운 추억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조수에 쓸려가버린 지난 시간의 파편들이 의미없는 부유물인양 떠돌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고 붙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조각들이 마음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단순한 곡조와 구성의 노래지만 불규칙한 박자는 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어렵게 하기에 나는 그저 듣고 또 들었을 뿐이다. 가슴뼈와 머리칼로 만들어진 하프의 사연이 담긴 자매들에 대한 노래처럼 심금을 울리는 읊조림이다. 하지만 인적 드문 세계에서 전화는 잘 울리지 않는다. 그 사이 하퍼의 노래가 몇번이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어떤 하나가 모든 것을 집어삼켜 묵음이 되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전화는 결코 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