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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가 궁금했지요

금요일에 반납해야 했지만 속에 탈이 나서 이틀을 꼼짝없이 누워 지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출근하면서 도서관부터 들렀지요. 아 그런데 오늘이 쉬는 날이었네요. 도서관 앞 주차장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몇대의 차가 있는데 출입구는 쇠로 된 장벽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것 좀 쌤통이다 싶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들 주인에겐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연체 상태라 다른 책을 빌릴 수도 없는데 휴일이라도 반납기가 있는 것을 알았기에 계단을 올랐습니다.

지난해 리모델링이 된 도서관은 반납기도 새로 갖췄더군요. 당장 눈앞에 보인 것은 ‘타도서관 서적 반납기’여서 잠시 당황했지만 옆을 보니 이곳 도서관을 위한 반납기가 따로 있었습니다. 예전의 그냥 집어넣는 수동식에 비해 스크린까지 달린 처음 보는 기계라 잠깐 멈칫했습니다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두툼한 가짜 하드커버의 보르헤스가 들어가니 모니터에 책이름이 나왔습니다. 책은 내 손을 떠나 서서히 밀려들어가는가 싶더니 저 아래 바닥, 틀림없이 아무런 쿠션도 책을 위한 보호대도 없는 양철 바닥으로 그 무거운 책이 떨어지며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놀라기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아픈 느낌이었습니다.

덜컹 겁이 난 나는 두번째로는 얇은 시집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꽤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허수경의 시는 내가 희망했던 것처럼 보르헤스 위로 떨어지지 못했는지 역시나 큰 소리가 났습니다. 세번째는 다른 두꺼운 보르헤스였습니다. 반납기 투입구로 조심스레 조심스레 책을 넣었지만 소용없는 짓, 들어갈 때만 천천히였지 급전직하로 떨어지더니 바닥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대체 다른 책이 있기나 한지 1미터쯤 된느 거리를 그냥 낙하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번째의 자그마한 에세이 또한 어떠한 요행도 없이 무게에 부족하지 않은 비명을 지르고서야 조마조마한 반납식이 끝을 맺었지요.

책을 수거하는 기계를 만든 사람은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그저 바코드를 이해해서 대여자를 찾아내고 반납등록을 하고 영수증을 찍어내고 그것 뿐이었을지요. 제작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한들 도서관인데, 도서관에서 기계를 시운전했을텐데 까짓것 추락은 괜찮은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깟 모서리의 상처 따위는 상관없었을지도요. 그렇게 떨어진다고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지야 않겠지만 멀쩡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적어도 보르헤스 두권은 묵직했던 만큼 그랬을 겁니다.

내 책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열광하며 뒤적인 책도 아니었지만 마음에 뒀던 내 책인양 아팠습니다. 저 아래 바닥에 낡은 신문지 몇장이라도 깔아놓았더라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을텐데 말입니다. 쿠션이 필요한 것이 도서반납기의 바닥인지 내 마음인지 헷갈렸습니다. 정작 궁금한 안부들은 묻지도 묻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떨어졌거나 밀쳤거나 원치 않게 달아나버린 한 권 또는 한 권 같은 페이지들 말이에요.

 

 

/2019. 5. 20.

 

 

희망 가요

차마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고 애닳게 기다리던 노래 있었지요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소식 하나 들려주길 고대하며 엽서 한장 써붙이던 시절도 있었지요 하지만 흘러나오는 노래란 바람빠진 풍선처럼  희망하지 않는 것들이었지요 희망 가요 희망이 가요 여기 희망이 가요 그렇게 흘러들 갔지요 떠난 자리에 희망이 또 갈까요 낮은 자리 또 채워질까요 원치 않는 노래만 줄을 잇는데 지우고 쓰고 또  찢었다 덕지덕지 이어붙입니다 마음에 담아둔 노래 하나 기다리며 또또 또또또 아무도 듣지 않을 신호를 보냅니다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쓰디쓴 바람에 희망가요 희망이 가요 신호를 보냅니다 또또또 또또 또.

 

/2019. 5. 6.

약간의 허함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퍼백에 넣어 온 <혼자 가는 먼 집>을
좌석 옆에 끼워뒀다 쉬엄쉬엄 다 읽었다
내게도 더이상 어울릴 수가 없을 법한 제목이었다
누군가 꿈꾸고 간 베개에 기댄 채+
불편한 자세에도 불편한 마음의 자세에도 더 어울릴 수는 없었다
보르헤스의 강의와 이창기는 미로처럼 찬밥처럼 화물칸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나는 기내 반입량을 초과하여 지퍼백에 1리터의 액체를 넣어온 것이었다
처음인양 보았고 처음처럼 마셨다
어떤 페이지는 집중해서
다른 사연은 설렁설렁 넘어갔다
엑스레이 투시기와 소지품 검사, 모든 감시망을 피해
투명한 지퍼백에 온갖 맛을 지닌 1리터의 액체를 몰래 넣어왔다
소울풀 모운풀 엉키고 풀리고 질척이는 것이
소줏잔이라도 깨물고 씹는 듯이
치떨며 부러워하며 찔끔찔끔 마셨다
약간의 허함 또한 그곳에 있었다
그렇다 허한 당신 허할 수
없었던 당신 먼 집의 전부일 것 같은
당신
그리하여 지난 밤에도 <혼자 가는 먼 집>에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 쭈그러진 지퍼백 속에
나눌 길 없는 허한 공기 속에
홀로 갇혀 있었다
썩어 없어질 몸은 남고
썩지 않는다는 마음이라는 썩어버린 악기++는

 

 

/2019. 4. 18.

 

 

+
씁쓸한 여관방,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후기, 허수경

saudades do……

자나깨나 너의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

 

많은 것이 그립고 안타까운 밤, 풀장 옆에 입주자들을 위해 설치되어 있는 바베큐 코너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밤공기는 좀 쌀쌀했지만 추위는 그닥 느껴지지도 않았다. 노트북 앞에 앉아 무심결에 즐겨찾기 링크를 눌렀더니 화면에 뜬 것은 옛 가요 사이트였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음악들을 비교적 쉽게 들을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또 우연히 내 귀에 들려온 것은 두 개의 다른 곡조의 <고향 생각>과 <망향>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의 <고향 생각>은 현제명의 곡이고, 다른 <고향 생각>과 <망향>은 번안곡이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번 떠나온 후에…”로 나가는 가사와 “물소리 새소리 들려오는…” 하던 <over and over>의 리메이크다.

<고향 생각>을 듣다 보니 또 다른 이의 <고향 생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바로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다. 이제는 그 열기도 많이 사그라져서 희미한 기억들, 그가 어느 해에 포르투갈을 방문했는지 정확히는 생각나지 않는다.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아마도 197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시인과 소설가, 가수와 예술가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saudades do brasil em portugal>이었다. 포터블 레코더로 녹음된 것인지 좋지 못한 음질에 어딘지 모르게 지금처럼 늦은 밤 같은 느낌에 쓸쓸함과 허무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지금 이 밤, 이 순간 나는 이 노래의 나라 이름들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두 가지 쓰린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내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겠지만 그 하나는 원제의 나라 이름을 바꿔서 넣으면 되겠고 그 반대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이곳 샌디에고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뒤바뀐 제목이 주는 쓰라림을 20여년 전에 그랬듯 이미 느끼고 있다. saudades do coreia em america,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씨꾸 부아르끼가 노래한 두 곡의 ‘파도’ 사이를 오가며.

 

sou eu em solidão pensando em ti
chorando todo o tempo que perdi……

 

 


/kátia guerreiro

 


/chico buarque de hollanda

 

내가 없는 날의 리스트 +

최근 친구 아버님의 문상을 다녀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만약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장례식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실없는 상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사실 그 생각은 한 두해 전, ‘노래 리스트’ 만들다가 시작된 것이다. <캡틴 판타스틱>에서 화장한 유골을 공항 화장실(^^)에 뿌리는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도 포함하여. <죽고 난 뒤의 팬티>처럼 소심한 삶의 안할 걱정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렇다. 확실한 것은 화장이고 내 몸에 대해서라면 어떤 흔적도 따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장례식 자체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건 지금 명확히 할 수가 없고 나는 그저 그런 행사(?)가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나 실컷 틀어줬으면 싶다. 내가 들을 수는 없으니(피카소의 마지막 말처럼) 몇 안되는 가까운 사람들이 그 노래들로 나를 기억했으면 하는 바램 같은 것이다. 아마 슬픈 노래도 있고 신나는 노래도 있고 웃기는 노래도 있고 고적함도 빠질 수는 없을 것 같다. 산소처럼(?) 상큼한 노래도 있고 재미없이 무덤덤한(!) 노래도 있고 그럴 것이다. 당연히 제사 같은 것은 필요 없지만 생일이나 떠난 날에도 역시 커피나 술이나 한잔 하며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줬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내 마음 같은 시와 소설과 에세이와 경전의 몇줄을 나눠주거나 읽는 것도 좋겠다. 내 글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이 들지는 잘 모르지만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없다.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해서 언제인지 모를 내가 이 세상에 없는 날까지의 작업 가운데 하나는 그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노래와 글들이 평소 내가 즐겨하거나 좋아한다고 알려진 것들과 꽤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귀가 아닌 마음에서 플레이 되는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알 수조차 없을) 네가 없는 날의 리스트이기도 하다.(그 가운데 하나를 말하자면, 어떤 느끼한 목소리가 노래하는 “초원의 자장가” 같은 것이다. 그 곡조는 내 마음을 적막하게 만들고 쓰라리게 만들지만 결국은 그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고 나를 달래준다. 미시시피 존 허트의 노래도 빠질 수 없을 것이고 그리움 가득한 이국의 “구절초”라고 할 “마르가르다의 향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문장에 관해서라면 알렙이나 델레나 엘리아…의 몇줄 같은 것, 머나먼 이국땅에 핀 스티븐슨의 금작화 같은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저 바램일 뿐, 어떤 의미에선 이미 이루어졌다.

 

 

/2019. 3. 15.

 

 

 

내가 쓴 가장 좋은 시

행 없이 행을 늘이고

끊어진 연으로 연을 이어 가지만

쓴 맛 없는 쓴맛뿐, 쓴 것은 없네

단 것도 없네

대개 짐이고 번민만 가득한데

내가 쓴 가장 좋은 시란

잠깐의 희망이 수십년 헛꿈으로 남은

아직 쓰지 못한 시

 

 

 

+<시인합니다>가 그랬듯 시 쓰기에 대해 나는 가끔 끄적여 왔다.
그때와는 다를 수 밖에 없는 지금, 하지만 비슷하기도 한 지금이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얼마전에는 할 수 없는 노릇이란 제목으로 또 그랬다.
무엇인지 어디인지 모를 중심(그런 게 있다면)의 언저리를
여전히 기웃거리면서 말이다.

지난 날의 소리들

소리에 관해서 제일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라면 어릴 적 할아버지의 외딴 방에 있던 크고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던 “눈물젖은 두만강”의 전주다. 금속성의 큼지막한 소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나에게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향수가 뭔줄도 모르고 ‘퍼퓸’인줄만 알았는데 말이다.

오늘 시간이 있어서 옛날에 쓰던 이어폰들을 좀 찾아봤다. 뒤져보니 나도 참 미친 짓 많이 했었나 보다. 숱한 엠디 플레이어와 이어폰들. 그것들을 뒤지게 된 것은 요즘의 커널형 이어폰이 너무 불편했고 그래선지 소리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이어폰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폰에 딸려온 (튠즈 바이) akg / b&o 제품들만 들어봤지만 나는 두 이어폰 모두 불편해서 잘 쓸 수가 없었다. 예전의 이어폰들도 솜을 끼우지 않고는 불편하다고 느꼈는데 아무튼 심히 편치 못했다.

그래서 옛날 이어폰들이랑 비교하면 소리가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제일 먼저 mdr-e888을 찾아봤다. 내 희미한 기억에 틀림없이 어디 하나 있긴 있을 듯 싶어 서랍 여기저기 찾아보니 뭔가 좀 끈적해진 선을 지닌 이어폰이 거기 있었다. 워크맨과 mdp의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이어폰이다.

내게는 본래 두 개의 888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3.5mm 구경의  lp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소니의 되먹지 못한 차별화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mp(미니 플러그) 방식의 것이었다. 하지만 두 제품 공히 즐겨 쓰지 않고 있다가 lp는 오래 전에 누군가에게 줬고 mp만 있었는데 다행이 mp를 sp로 바꿔주는 변환짹이 하나 있어 연결이 가능했다.

그래서 akg, b&o(하지만 그들이 만든 제품은 아니다)라는 이름들이 새겨진 두 이어폰과 비교해서 들어봤는데 착용감이나 소리나 내게는 888이 맞는 것 같았다. 리메이크 버전의 love is the drug을 틀었다가 감이 잘 오질 않아 데이빗 브로자의 하이 눈을 들었다. 내가 꽤 좋아하는 ‘타는 목마름’의 노래다. 그래서 (내 기억에 저음이 강력한 것으로 알려진) 독특한 모양새의 mdr-ed136과 mdr-ed238로도 테스트를 해봤는데 238이 꽤 편하게 들렸다.  이 두가지 이어폰은 이어폰의 한 부분이 돌출한 것이 아주 작은  커널(?) 같은 느낌이 있었다.

mp 플러그를 일반으로 변환하는게 mp1s인지 mp2s인지 가물가물한데 그건 하나 밖에 없고 사제품이라 조심스러웠다. 반대로 변환하는 짹은 세개나 있는데 말이다. 그런 문제들 해결하느라 부산의 덕성전자를 틈만 나면 오가고 서울 낙성대(지금도 영업을 하는지 좀 불분명하지만 ‘낙성대av’라고 한다)에 주문을 해서 택배를 받던 시절이었다. 내친김에 샤프 번들 이어폰과 (내가 제일 편하게 사용했던) 켄우드의 번들 이어폰(mx-400 또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oem 제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도 감상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888, 136, 238에서는 데이빗 브로자의 반대편에서 나오는 또다른 목소리, 내가 몹시 좋아하는 이의 음성이 꽤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노래를 아주 많이 듣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어딘지  특별한 영혼을 지닌 이라는 막연하면서도 꽤 분명한 확신이 드는 그런 사람이다. 하이 눈을 특히나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이어폰 챙기다 보니 어떤 것은 이어폰을 감쌌던 솜이 문드러져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것은 일부 사용하지 않고 넣어뒀던 이어폰 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중으로 지퍼백에 넣어뒀던 몇몇은 용케 괜찮아서 888에 끼울 수 있었다. 문드러진 이어폰 솜과 까마득히 잊고 지낸 오래된 기기들이 21세기의 도끼자루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에, 아마도 4월 이후 쯤엔 시간을 내어서 mdp와 몇몇 카세트도 한번 챙겨봐야겠다. 멋지게만 들렸던 켄우드의 베이스가 지금도 그렇게 들릴지 궁금하다. 당시 소니 워크맨의 최전성기 대표작이었던 fx5 카세트는 조카에게 줘서 없지만 카세트 플레이어도 몇몇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잠깐의 즐거움일 뿐이고 어리석고 모자란 이의 잔재 같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내 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어폰이라던 내 오래된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이제 확신할 수도 없지만 외할아버지의 라디오에서 나오던 소리, 전파상에 적혀 있던 ‘라듸오’ 수리라는 글자는 별다른 플레이어나 도구가 필요치 않고 내 마음에서 지워지는 법이 없다.

 

 

+확인해보니 미니플러그를 일반플러그로 변환하는 짹의 정확한 명칭은 pc-mp2s다. 지금도 일본서는 드물게 판매하는 것 같은데 2만원을 넘어가기도 하는 것 같다.

할 수 없는 노릇

1년이 지났는지 2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장난 전광판인양 글 한줄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네요. 풀죽은 마음이 바늘 끝에서 안절부절입니다. 韻 타고 나지 못한 생이 運이라도 있고 없고 시인하기 힘든 일이지만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요, 이제 더는 할 수 없는 노릇, 하지만 안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10년이 지났는지 20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걷지도 멈추지도 못한 채 한 발 들고 잠시 잠깐 생각을 합니다. 어찌 못할 노릇으로 내게 날아온 당신, 붙들지 못한 당신을 평생토록 생각합니다.

 

 

/2019. 2. 13.

 

 

퀸 메모랜덤

그러고 보니 queen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하면 좀 까마득한 느낌도 들고. 그렇게 화제가 되었던 <보헤미안 랩소디>도 나는 무덤덤했다. 어릴 적에야 퀸의 노래도 나름 좋아했지만 나로선 그 영화를 통해 추억을 반추할만큼 몰입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 나름의 기억을 통해 퀸에 대해 잠깐 돌아보았다.

내가 처음 퀸을 알게 된 것은 열넷, 열다섯 쯤이었지 싶다.  <월간팝송>에서 보았던 흐릿한 흑백의 퀸의 사진들은 (이제 와서 보면) 약간은 동성애 코드가 느껴지는 모자와 가죽 재킷 같은 패션들도 있었나 보다. 그때 내가 알았던 노래라곤 we will rock you와 다른 두어곡 정도였던 것 같고, 우연히 카세트 테잎에 녹음된 빌리 조엘의 the stranger를 들으며 혹시 퀸의 노래는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조금 더 듣긴 했으나 ‘아주’는 아니었다. 그때 영어 과외를 했는데 선생님의 딸도 같이 수업을 했다. 그 집에서 (그녀가 틀어줬던) 퀸 노래를 몇 번 들었던 생각이 난다. 그 가운데 하나는 bicycle race였던가 싶다. 내가 태어나서 이성과 처음으로 컨택(‘4종 근접 조우’는 물론 아니었다!)한 것이 그녀였는데 우습게도 내가 아니라 그녀쪽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서울로 이사가기 직전에서야.

어느 날엔가 우리집이랑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던 그녀가 집앞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게 카드인지 편지인지 사연을 담아 전해줬고 방학때 내려와서 보자고 했던 생각이 난다. 그녀가 you are my best friend를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그래서 나도 가끔 그 노래를 통해 그녀를 그려보곤 했다. “whenever this world is cruel to me……”.

 


/you are my best friend

 

여름방학이 되어서 그 친구는 정말 부산으로 내려와 연락을 했으나 나는 그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너무도 당황스러웠던 까닭에 만나는 것도 다음 날로 했었다. 나는 버벅대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나 스스로도 이해 못할) 뜬금없는 소리에 엉뚱한 행동만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녀는 몹시 실망했을 것이다.

콜린 윌슨의 <살인의 철학> 후반부에 나오는 어떤 소년(청년?)이 여자 친구와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급기야 그녀를 살해해버린 사건을 기억한다. 어쩌면 나는 그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과 비슷한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mama, just killed a gial ㅡ 결과 또한 다르지 않아 나는 그해 여름 하루에 어이없는 방식으로 그녀를 죽이고야 말았다. 사실은 그녀가 날 죽이고 떠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그때의 작은 사건만큼 어이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남녀불문, 나는 비슷한 살인을 이후로도 꽤 많이 저질러왔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에 관한 부끄러움은 회복불능이다.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든, 불가해한 미스터리에 관해 이해를 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끄적이는 것도 그 회복할 수 없음에 관한 미미한 변명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퀸의 어느 레코드판에 내 잘못으로 만들어진 치명적인 흠집이 여전히 판을 튀게 만들고 있기에.

<hot space> 앨범까지는 거의 다 들었지만(“let me hear your body talk”라던 올리비아 뉴튼 존의 피지컬을 좋아했듯 그 앨범의 body language 가사를 좀 좋아했었고 life is real도 가끔 들었다)  이후에 나온 느끼한 팝 스타일의 음악들은 거의 들은 적이 없었고 보헤미안 랩소디가 난리법석일 때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다큐멘터리였더라면 나는 영화보다는 조금 더 좋아했을지 모르겠다.

play the game을 들을 때는 담배를 피웠고(“light another cigarette and let your self go”), save me에서처럼 나는 “naked and far from home”이라 느끼곤 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가슴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ㅡ 이제는 딥 퍼플 만큼이나 듣는 일이 별로 없는 퀸이지만 딥 퍼플의 몇몇 곡이 가끔 마음에 어리듯 생각나는 노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옛날의 어이없는 짧은 만남에 대한 변명을 지금 읊어대는 것처럼.

묻히고 잊혀지고 지워지고 사라졌다고 한들 깡그리 묻히는 것은 없다. 오래 전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로 우스개 소리 하는 것 들은 적 있다. 다시 보고, 다시 보고, 또 다시 보고…… 끝없이 봐야 하는 꺼진 불처럼 아주 가끔은 그런 것이다.

 

“don’t you hear my call
though you’re many years away
don’t you hear me calling you……”
/39

 

 

 

/2019. 2. 11.

 

the thread that keeps us

플로레스와 타말레스. 조이 번과 하이로 사발라가 쓴 이 노래는 묘한 중독성을 지닌 꿈비야 스타일로 꽤 신나는 곡이다. 전부 다 알아먹을 수는 없어도 내게는 기약없는 약속, 지켜지지 않은 약속 같은 노랫말이 슬픈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이 곡이 실린 앨범의 타이틀 <the thread that keeps us(2018)>까지가 여태 끊어지지 않은 가녀린 어떤 ‘緣’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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