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를 좋아하시나봐요.” 책상 위에 읽으려고 둔 몇 권과
도서관서 빌려온 책들이 쌓여 있었지요.
그냥 잘 알지 못해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려운 책인데요.” 너가 어찌 이런 책을 읽느냐는 뉘앙스가 풍겼지만
그저 몇 페이지를 보려고 빌렸고 읽기가 힘들다고 했지요.
사실이 그랬지요. 몇년을 두고 있었지만 세권짜리 그 책을 아직 반의 반도 읽지 못했죠.
어찌 좀 낯선가요, 찬은. 저의 진짜 이름이어요.
운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집안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그럴 듯한 이름입니다.
아는 게 별로 없어 2주에 한번 도서관 가서 책 빌려 와 읽지만
그것도 다 읽기는 힘들었습니다.
어떤 것은 몇페이지만 보고 가끔은 다 읽기도 합니다.
부족한 머리로 들어오는 것도 없고 나오는 것도 없습니다.
찬은이에요. 빙빙돌아 마침내 알아낸 가문의 비밀이에요.
습한 지하세계 너머의 저 윗쪽, 보송보송한 양의 꿈을 꾸는 언더로이드에요.
어찌 하오 어찌 하오 흘러간 옛노래에 여전히 마음 쏟을 때
화장실로 달아나야 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의
진짜 같은 이름이에요.
[카테고리:] likealog
색깔론, 그레이의 수많은 그림자
내가 좌파냐 우파냐, 또는 내가 진보냐 보수냐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을 그리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회색주의자다. 여기서 회색이란 이들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을 섞은 중간의 색으로서의 회색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또는 현재의 상황에 따라, 또는 어떤 특정한 사안에 따라, 그 모든 것들에서 내 색을 찾을 수 있고 달리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색주의자, 또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쯤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이 진보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 관해서는 나는 전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앞으로 내가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 결단코 진보적인 색채를 띠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진영논리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며, 기본적으로 나는 자유주의자이고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란 비어스가 악마의 사전에서 했던 이기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의 예시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비어스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한 그의 단어 해석을 통해 ‘이기적인’이란 단어를 ‘남의 이기심에 대한 배려가 없는’이라고 정의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최근의 정치적 상황들에 대해 대부분 매우 부정적이며, 현실적인 힘이 부족한 쪽의 편이다.
물론 이 또한 내일도 그러하리란 이야기는 아니며, 특정한 어떤 정치적 신념의 지지지라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온 마음으로 지지해야 할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으며 그것과 관련된 정치적 성향에 관련없이 그 어느 쪽에나 존재하는 수많은 정치적 위선들을 혐오한다.
그레이의 수많은 그림자, 밝은 곳에서 그것은 검은 빛에 가깝고, 어두운 곳에서는 백색의 음영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수많은 빛깔들이 있고 내 생각도 그렇게 켜켜이 나뉘어 있다.
private folk psych
어떤 때는 울기도 했다.
어떤 때는 어딘지 모르는 먼 나라의 십자로를 걸었다.
/이상
우연히 들여다본 hwabian 1의 페이지는
오래도록 잊어버린 “페어리 테일”의 느낌이다. ‘동화’와는 조금 다른.
내게는 향수어린 세계,
닿지 못할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
지금은 좀 다른 곳을 향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포크 음악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나 노래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
방대한 분량에 놀라고, 그 집요함에도 놀란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열의가 음악 그 자체에 있음도 그렇다.
유튜브의 몇몇 이국 사람들에게서
나와 꽤 비슷한 취향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지만 일정 부분 비슷한 취향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혀 다른 틀이 새로운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데
hwabian 1의 페이지가 그랬다.
하지만 창 너머 허름한 길에서 슬쩍 훔쳐보는 풍경 같은 것임에
나로선 조금 마음이 아프다.
<고독 행성>,
박정대의 몇줄이 그녀를 대신하고 있다.
/driven by the rain, greg welch
/2019. 8. 14.
watching the watchers
돌아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허울좋은 명분을 미스릴의 갑옷인양 여전히 걸쳐입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빛나는 갑옷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감시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 감시자들의 역할 또한 교묘하게 변화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감시해야 할 대상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하는 개인을 감시하는 감시자는 감시자가 아니다. 설혹 개개인에게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감시의 대상자가 저질렀거나 저지를 수 있는 문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짓을 하는 자칭 감시자들이란 사건의 은폐자이며 돌이킬 수 없는 공범일 뿐이다. 아직은 빛을 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허울이라는 것, 한 세월 멋지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 부조리한 세계라지만 전적으로 부조리하지만 않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조리의 진정한 본질이기에 어떤 경우라도.
형편없는 이어폰
소니 mdr-e888이 내가 아는 최고의 이어폰이었던 시절이 조금 지난 뒤 나는 “내 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어폰이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무슨 근거 박약한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드웨어에 대한 소프트웨어의 우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것이 물론 ‘청력’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내 귀는 좋은 이어폰은 아닌 것 같다.
지난 밤 모처럼 헤드폰 이것저것 꺼내서 좀 들어봤다. 헤드폰을 수집한 것도 아닌데 내가 뭘 잘 버리지 않다 보니 오래된 것들도 몇 있었다. 젠하이저의 자그마한 헤드폰 2종, 그리고 블루투스 2종, 알레산드로 헤드폰 하나, 젠하이저 유선 헤드폰, 그리고 보스의 헤드폰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저것 들어봐도 압도적인 차이를 느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내 귀가 그런 쪽으로는 그리 예민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고, 또 음악이 어떤 것인지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곡인지가 비할 수 없이 의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의 15년쯤 전에 구입한 px200도 나름 괜찮았다는 점에서(패드가 다 해져서 그것만 교체품을 구해서 쓰고 있다) 스스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게 있어 극적인 차이란 것은 크고 작은, 미세하거나 분명히 드러나는 음질의 차이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내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어떤 것이냐에 관한 느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음악적인 취향도 그렇고 민감하지 못한 음감도 그렇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음악을 들어 왔지만 내 귀는 말하자면 형편없는 이어폰이라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젠하이저 헤드폰을 주로 구입했던 것도 mx400 이어폰의 무던함, 그리고 여러모로 ‘다크한 느낌’과 함께 이외에는 아는 메이커도 별로 없어서 그랬지 싶다.) 그리고 형편없는 이어폰을 장착한 그 머리 위로 형편있는 헤드폰을 얹는다고 해서 딱히 형편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모자란 내 귀에 맞는 음악, 조금 과분한 음악을 찾아 들었을 뿐. 그리고 여기 고백하자면 십수년 전의 가장 좋은 이어폰이나 오늘의 형편없는 이어폰이나 사실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 따위는 노이즈 캔슬링으로 차단되어버린 세계에서 나는, 흔해빠진…….
날개가 부르는 소리
그 여름날의 산자락, 재래식 화장실에는 알지 못할 작은 곤충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레들의 날개짓 소리가 작지만 또렷하게 여기저기서 들렸다. 역한 냄새, 역한 소리 속에 누군가는 그것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딘가의 존재가 되었음에 그 작은 목숨들의 소리가 묘하게 처연하게 들렸던 것을 기억한다.
<날개가 부르는 소리>는 아가싸 크리싀티의 단편 제목이다. 오래 전에 몇번이고 읽은, 그녀의 일반적인 범주가 아닌 환상소설이었다.(그녀의 단편 가운데 일부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인상적인 제목 말고는 거의 생각나는 것이 없다. 어떤 특이한 존재와의 조우에 관한 것이었던 것도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만약 오늘 집에서 그 책을 찾아 다시 읽는다면 나는 많은 대목들을 새삼 기억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대로,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여도 괜찮다. 기억못하는 것보다 안타깝거나 서글픈 것이 있다면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전혀 간지럽지도 않은,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겨드랑이로 하루를 보내는 것 말이다. 아스피린, 아달린……
그 여름날은 무척 더웠다. 하지만 긴 소매의 검은 자켓을 입어서 덥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더 더웠으면 싶었고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으면 싶었다.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세월도 몸도 우리의 기억도 어이없이 흩어졌다. 어떤 것은 오늘처럼 생생하지만 또 어떤 순간, 하루, 나날들은 너무 생각나지 않아 힘들고 괴로울 때도 있다. 하지만 기억은 기억대로 망각은 망각대로 이리저리 흩어지고 뭉쳐가며 우리 안에서 잃어버린 너를 그리고 또 간직하고 있다. 깡그리 잊어버린 이야기가 되어도 사연은 거기 그대로 있다.
/2019. 6. 3.
1층으로부터의 편지
<내재율>
내ː재-율, 內在律
자유시나 산문시 등에서 문장 안에 잠재적으로 깃들여 있는 운율. ↔외형률(外形律).
/구글 사전
언제나 낯선 길 ㅡ 오늘 사무실 나와 보니 문 앞에 종이 하나 꽂혀 있었다. 손님의 메시지인가 했는데 아래층 맥주가게서 빼곡히 적어놓은 사연이었다. “만나 뵐 기회가 많지 않아서 편지 드립니다”로 시작한 글은 실은 일종의 수기식 수도요금 청구서였다.
오래된 낡은 건물이다 보니 계량기 하나로 서너 군데서 나눠 내고 있는 상황으로 예전엔 3층에 사시던 분이 총무 역할을 하셨으나 그분 이사 가고는 1층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안 그래도 몇 달 지났는데 어째 연락이 없어 한꺼번에 받으려나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청구서가 날아온 셈이다. (약간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으나…) 요금을 1층에서 맡게 된 경위부터 해서 몇 달간의 요금 총액과 기간, 내가 부담해야 할 부분, 심지어 한 달가량의 공백까지 고려해서 계산을 해둔 것이었다.
그래서 곧장 입금을 하고, 적힌 번호로 미리 챙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추후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간단하게 부담할 요금만 알려주면 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들여다보니 작은 노트 한 장에 빼곡히, 삐뚤빼뚤 글씨가 새삼 예쁘게 보였다.
어쩌면…… 일종의 ‘내재율內在律’ 같은 것. 때로는 이런 쪽지 한 장이 내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이었다. 그게 산문이든 운문이든 상관없이 번드레한 ‘외형률外形律’처럼만 보였던 것 ㅡ 오늘 우연히 본 어느 신문 ‘마음치유사’의 도무지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애송시와는 비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의 내재율/외형률은 글자 숫자가 맞네 안맞네 하는 것이 물론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마음의 운율 같은 것, “5월분은 한 달 동안 문 닫아놓으셔서 반만 주시면 될 것 같네요. 이상한 점 있으시면 (ooo-oooo)번으로 연락주세요”가 그랬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韻이고 律이다. 아무나 좀처럼 쓰지 못하고 대부분 읽으려고도 하지 않는.
/2019. 5. 31.
안부가 궁금했지요
금요일에 반납해야 했지만 속에 탈이 나서 이틀을 꼼짝없이 누워 지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출근하면서 도서관부터 들렀지요. 아 그런데 오늘이 쉬는 날이었네요. 도서관 앞 주차장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몇대의 차가 있는데 출입구는 쇠로 된 장벽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것 좀 쌤통이다 싶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들 주인에겐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연체 상태라 다른 책을 빌릴 수도 없는데 휴일이라도 반납기가 있는 것을 알았기에 계단을 올랐습니다.
지난해 리모델링이 된 도서관은 반납기도 새로 갖췄더군요. 당장 눈앞에 보인 것은 ‘타도서관 서적 반납기’여서 잠시 당황했지만 옆을 보니 이곳 도서관을 위한 반납기가 따로 있었습니다. 예전의 그냥 집어넣는 수동식에 비해 스크린까지 달린 처음 보는 기계라 잠깐 멈칫했습니다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두툼한 가짜 하드커버의 보르헤스가 들어가니 모니터에 책이름이 나왔습니다. 책은 내 손을 떠나 서서히 밀려들어가는가 싶더니 저 아래 바닥, 틀림없이 아무런 쿠션도 책을 위한 보호대도 없는 양철 바닥으로 그 무거운 책이 떨어지며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놀라기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아픈 느낌이었습니다.
덜컹 겁이 난 나는 두번째로는 얇은 시집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꽤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허수경의 시는 내가 희망했던 것처럼 보르헤스 위로 떨어지지 못했는지 역시나 큰 소리가 났습니다. 세번째는 다른 두꺼운 보르헤스였습니다. 반납기 투입구로 조심스레 조심스레 책을 넣었지만 소용없는 짓, 들어갈 때만 천천히였지 급전직하로 떨어지더니 바닥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대체 다른 책이 있기나 한지 1미터쯤 된느 거리를 그냥 낙하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번째의 자그마한 에세이 또한 어떠한 요행도 없이 무게에 부족하지 않은 비명을 지르고서야 조마조마한 반납식이 끝을 맺었지요.
책을 수거하는 기계를 만든 사람은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그저 바코드를 이해해서 대여자를 찾아내고 반납등록을 하고 영수증을 찍어내고 그것 뿐이었을지요. 제작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한들 도서관인데, 도서관에서 기계를 시운전했을텐데 까짓것 추락은 괜찮은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깟 모서리의 상처 따위는 상관없었을지도요. 그렇게 떨어진다고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지야 않겠지만 멀쩡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적어도 보르헤스 두권은 묵직했던 만큼 그랬을 겁니다.
내 책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열광하며 뒤적인 책도 아니었지만 마음에 뒀던 내 책인양 아팠습니다. 저 아래 바닥에 낡은 신문지 몇장이라도 깔아놓았더라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을텐데 말입니다. 쿠션이 필요한 것이 도서반납기의 바닥인지 내 마음인지 헷갈렸습니다. 정작 궁금한 안부들은 묻지도 묻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떨어졌거나 밀쳤거나 원치 않게 달아나버린 한 권 또는 한 권 같은 페이지들 말이에요.
/2019. 5. 20.
내가 없는 날의 리스트 +
최근 친구 아버님의 문상을 다녀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만약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장례식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실없는 상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사실 그 생각은 한 두해 전, ‘노래 리스트’ 만들다가 시작된 것이다. <캡틴 판타스틱>에서 화장한 유골을 공항 화장실(^^)에 뿌리는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도 포함하여. <죽고 난 뒤의 팬티>처럼 소심한 삶의 안할 걱정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렇다. 확실한 것은 화장이고 내 몸에 대해서라면 어떤 흔적도 따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장례식 자체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건 지금 명확히 할 수가 없고 나는 그저 그런 행사(?)가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나 실컷 틀어줬으면 싶다. 내가 들을 수는 없으니(피카소의 마지막 말처럼) 몇 안되는 가까운 사람들이 그 노래들로 나를 기억했으면 하는 바램 같은 것이다. 아마 슬픈 노래도 있고 신나는 노래도 있고 웃기는 노래도 있고 고적함도 빠질 수는 없을 것 같다. 산소처럼(?) 상큼한 노래도 있고 재미없이 무덤덤한(!) 노래도 있고 그럴 것이다. 당연히 제사 같은 것은 필요 없지만 생일이나 떠난 날에도 역시 커피나 술이나 한잔 하며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줬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내 마음 같은 시와 소설과 에세이와 경전의 몇줄을 나눠주거나 읽는 것도 좋겠다. 내 글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이 들지는 잘 모르지만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없다.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해서 언제인지 모를 내가 이 세상에 없는 날까지의 작업 가운데 하나는 그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노래와 글들이 평소 내가 즐겨하거나 좋아한다고 알려진 것들과 꽤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귀가 아닌 마음에서 플레이 되는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알 수조차 없을) 네가 없는 날의 리스트이기도 하다.(그 가운데 하나를 말하자면, 어떤 느끼한 목소리가 노래하는 “초원의 자장가” 같은 것이다. 그 곡조는 내 마음을 적막하게 만들고 쓰라리게 만들지만 결국은 그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고 나를 달래준다. 미시시피 존 허트의 노래도 빠질 수 없을 것이고 그리움 가득한 이국의 “구절초”라고 할 “마르가르다의 향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문장에 관해서라면 알렙이나 델레나 엘리아…의 몇줄 같은 것, 머나먼 이국땅에 핀 스티븐슨의 금작화 같은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저 바램일 뿐, 어떤 의미에선 이미 이루어졌다.
/2019.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