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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

아흔 아홉 구비 깎아 강릉 가는 새로 낸 길
일곱 개 터널 뚫은 휴게소
화장실 정원 구석에서 슬픈 듯 기쁜 듯
그렇게 만났다
/남천, 시냇물

 

창녕 집에 작게 프린트한 시 두편이 있다. 하나는 구절초, 그리고 다른 하나는 괴이한 제목에 몇줄 되지 않는 내 시다. 집에서 볼 적에 마당 왼편에는 구절초가 여기저기 피어 있고 햇빛 잘드는 작은 유리창가에는 박용래의 시가 있다. 내 시도 하드보드 종이에 붙여 거기 세워두었다.

대문 옆 모서리에는 남천이 빼곡히 자라 있는데 생생한 초록잎과 새빨간 열매가 푸르름을 자랑한다. 나는 오래도록 그게 남천인지도 몰랐는데 시냇물의 시 때문에 알게 되었다.

 

네 어디 서 있던들 내가 못 적을까
오리온이 비행하는 바람 강한 겨울밤에
어느 숲, 다시 만나더라도
활짝 웃음으로 기억해줄게
/남천, 시냇물

 

공교롭게도 지은이가 남천을 반갑게 맞이한 곳은 휴게소 화장실 정원 구석이었지만 “내 어디 서 있던들 내가 못 적을까”로 슬픈 듯 기쁜 듯한 마음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네 줄을 나는 몹시도 좋아한다.

우연찮게 창녕집의 그 자리도 화장실 뒷편이다. 진짜 화장실은 아니고, 마당일 밭일 하다 애매할 때 화장실로 쓰기 위해 싸리로 짧은 담장을 세워 임시로 사용했던 자리다. 지금은 그렇게는 아닌 듯 남천만 훌쩍 자라서 예쁘장한 모퉁이를 만들고 있다. 사진이나 글을 코팅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지만 <남천>만큼은 코팅해서 이곳에  걸어두고 싶다.

다음에 내 시를 한다면 <다 녹은 초콜렛>이나 <라운드 미드나잇> 등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하운과 정지용, 시냇물의 다른 몇몇 시편들도 떠오른다. 남천의 영문 이름 가운데 하나, Heavenly bamboo가  남천 그리는 내 마음 같다. 오리온이 비행하는 바람 강한 11월, 마지막  밤에.

 

 

2022. 11. 30.

 

 

+
지은이에게 매우 송구하지만……
바깥에 둬야 하는 까닭에 글자를 크게 해야 하는데
시행이 많이 길어 부득불 열로 붙여 행을 줄였다.

금요일의 공동운명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도 있고
재앙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두 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취급해야 해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난 금요일이었다. 모처럼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이 친구와의 식사에 있어 나는 선택권을 전혀 갖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가 음식점을 잘 아는데다 잘 아는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랬다.

어제는 초량의 중국집과 송도의 어떤 식당을 내게 말했다. 내심 나는 모처럼 초량엘 가고 싶었지만 그가 송도를 가고 싶어하는 눈치여서 좋으실대로 하라 했더니 송도를 택했다. 모처럼 가보는 송도, 고등학교 시절 옛친구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느 정류소에서 내려 한산한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다마스 한대가 서 있었고 우리를 보더니 도움을 청했다. 몹시 좁고 가파른 비탈길에 주차를 했다가 가려는데 한쪽 바퀴가 바닥에 닿지 않은 상태가 되어 헛도는 상황이었다. 운전자와 다른 한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더러 뒷쪽 짐칸에 좀 타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타면 그 무게로 바퀴가 닿을까 기대하는 것이었다. Read More

The day the music died

1980년 12월, 존 레넌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Times 커버를 아직 기억한다. 거기에는 그의 초상화와 함께 “When the music died”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표현은 예전에도 여러번 붙은 적이 있다. 가사만 봐도 그렇다. 버디 할리와 리치 발렌스가 죽은 1959년의 비행기 사고를 “The day the music died”라고 표현하고 있다. Read More

파괴자들

그레이엄 그린을 조금 좋아한다. 고3 시절 수험생으로서의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던 상태에서 읽었던 책 가운데 하나, <제3의 사나이>에 대한 당시의 매혹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 마틴즈처럼 가슴이 뛰었던 것을 기억한다.

문학상에 어울리는 작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심오하진 않더라도 한편의 멋진 영화(오손 웰즈가 나온 <제3의 사나이>처럼!)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그의 두툼한 단편집 제일 앞에 실려 있던 <파괴자들>이 자꾸 생각난다. Read More

떠난 후에 읽는 글들

어제
손에 불타는 석탄을 쥐고
마구 던지려 했다.
밤새 손바닥이 아려왔다.
알다시피 그게 아니라……

그리고 때늦은 소식처럼 허수경의 책이 왔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꽤 양면적이지만
시에 관해서라면 독보적인 세계를 지닌 그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From her to eternity란 제목으로 글을 끄적였다.

그리고 며칠 전 피란델로 책을 구하다 그녀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일러두기’와 달리 내가 편안함을 느끼곤 하는 시 같은 글과
글 같은 시들이 거기 있었다.

고운 자주빛 표지에
무선제본식 가짜 양장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리고 책갈피처럼 들어있는 엽서의 짙은 오렌지빛이
귤 향기에 대한 상상을 방해하지만
병문안 온 사람처럼 조심조심 나는 책을 펼쳤다.

From here to eternity.​

 

 

/2022. 4. 6.

내가 시를 쓴다는 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한복음 21-11

 

 

이창기의 <모나미 볼펜처럼>에 마음 갔었지만 모나미 볼펜을 좋아한 적은 없다
펜대는 너무 가늘고 0.7mm의 볼은 꾹꾹 누르지 않으면 필기도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몹시도 사무적이고 관공서적인 그 느낌이라니 Read More

(경) 디비아스키 에이지 (축)

에베레스트산만한 거대한 혜성이
지구로 날아오는 게 좋은 게 아니잖아요?
우리끼리 그런 최소한의 합의도 못 하고 처앉았으면!
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서로 대화가 되기는 해요?
어디가 망가진 거예요?
어떻게 고치죠?
/돈 룩 업, 랜달 민디 교수

 

북미의 평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국내는 달랐던 것 같고, 우울한 결말임에도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제니퍼 로렌스, 케이트 블란쳇,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좋았고 마이크 라이런스가 <스파이 브리지스>의 그 사람인 것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정말 나쁜놈이었건만 라이런스의 연기와 역할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위선자의 진정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파국에 관한 블랙코메디지만 많은 부분에 현실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여기……

 

 

Slowly but Surely. 우리를 향해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돌진해오고 있는 진정한 재앙 ㅡ 우리들의 디비아스키 혜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이땅에 내려꽂힐지도 모를 어떤 시대가 그것이다. 무오류로 빛나는 그분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숱한 이적들, 당의 지도하에 완성되는 신분제도와 함께 은덕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룩업은 언감생심, 돈. 룩.업이다. 한치 앞을 생각지 않는 어리석은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업으로 돌아올  것이다.

누군가의 디비아스키는 아슬아슬하게 지구를 스쳐 지나갈 것이고, 다른 누군가의 디비아스키에 지구는 부서질만큼 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으로도 끝난 것은 없다.

 

 

/2021. 12. 31. (+이 글은 2022년 3월에 다시.)

 

 

다행히 염려할 수 있는 하루

아버지가 2주 동안 혈압약을 드시지 않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병원 진료결과를 보고 왔던 저녁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소리도 좀 질렀나 보다.

6학년때 아버지께 알파벳과 기초영어를 배웠다. 어느날 펜맨쉽을 사오신 아버지는 그걸 하루만에 다 쓰라고 하셨다. 내게 그건 너무 많은 양이었고 나는 그것을 결코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몰래 몇장을 찢어내고 나머지를 채웠다. 저녁 퇴근해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펜맨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내가 아직 잘모르는 영어 문장으로 나를 타박하셨다. 나는 나중에 혼자 좀 울었던 것 같다.

한달쯤 전, 아버지는 누나네가 있는 서울 다녀오셨다. 걸음이 많이 불편하고 정신이 조금 흐리긴 해도 휠체어까지 사용해서 기차에 태워드리면 서울에서 누나네가 기차까지 들어와서 모셔가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기차에서 나올 시간이 되자 아버지는 뭔가 불안했던지 살짝 눈물까지 비쳤다. Read More

접시꽃 당신?

털달개비, 접시꽃 화분 전해주신 할아버지께서 예고없이 오셨다.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분이신지라 모임에 발표할 글 때문이었다.
일하는 동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접혀지고 구겨진 봉투 셋을 꺼내서 주셨다.
접힌 봉투마다에 불편한 손 떨리는 손으로 쓴
꽃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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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이면도로에 문 꼭 닫고 주차한 채 에어컨 빵빵하게 돌리고 있는 디젤 SUV.
공감하는 척 하는 능력 / 공감 능력.
폐.
저장(강박).
브라질 음악/리듬.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 시대의 브라질 아티스트들.
꿈비아, 케이준, 파두.
마야, 아즈텍, 잉카 시대의 삶과 전설과 역사.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쓴 텍스트.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