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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종류의 고독

<침묵의 질주 Silent Running>, 더글러스 트럼불, 1971
오랫동안 한 척의 우주선도 오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난 것일까?
ㅡ 두번째 종류의 고독, 죠지 R.R. 마틴

 

영화를 어디에서 봤는지가 가끔은 영화 자체보다도 더 선명하게 기억날 떄가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엔 승객이 거의 없는 고속버스 안에서 비디오로 보았고 <침묵의 질주>는 고등학교 1학년 쯤엔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제목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그 영화를 방영했으나 내가 본 것이라곤 겨우 마지막의 폭발 장면뿐이었다. 금세 조안 바에즈의 테마가 흘렀고… 그럼에도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오래전에 보았던 바로 그 영화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제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래되고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영화는 흑백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더불어 굉장히 적적하고 고독한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우주선과 식물원을 관리하는 조그만 로봇들과의 카드놀이가 이상하게 기억이 났다.
최근에 다시 한번 보았지만 이번에는 자막도 없는 것이어서 그림만으로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스토리를 엮어보면…

토성 궤도 근처의 우주 식물원에서 지리한 업무를 이어가는 4명의 승무원들에게 스테이션을 폭파시키고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이곳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던 주인공은(이름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을 죽이고 홀로 남게 된다. 하지만 그다지 변한 것은 없다. 영화 초반부에서 동료들과 함께하던 트럼프 게임이 로봇들과의 게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 많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 고적감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는지 죄책감 탓이었는지 그는 결국 식물원 일부를 떼어내어 우주 공간에 남겨두고 자폭을 선택한다.

 


우주선 Valley Forge의 현창에 비친 자폭 직전의 장면

 

영화는 오래도록 우주 스테이션에서 혼자 지내다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두번째 종류의 고독>이라는 죠지 R.R. 마틴의 단편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4년 여를 혼자 고립된 채 지내온 우주의 간이역 근무자가 자신과 교대하러 온 우주선을 ‘작위적인 사고’로 파괴시키고는 또 하염없이 교대자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다. 엉뚱하게도 나는 <두번째 종류의 고독>이 이 영화의 진짜 제목 같은 느낌이 든다.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특수효과를 맡았던 사람이라고 하던데 시대에 따라 급속히 변화하는 테크날러지의 허망함이라고 해야 할지 요즘 방식의 현란한 볼거리는 전혀 없었다.
마치 50년대의 UFO 목격자들이 그린 우스꽝스런 비행접시마냥 우주선과 로봇들은 너무 촌스럽고 폭발 장면도 매우 밋밋하고 단순하다. 또 어떤 이는 이 영화가 너무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했고 그런 이유들로 좀 엉성하게 망가진 영화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질주>에는 나로 하여금 심정적인 일치감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다. 물기가 너무 많아도 그렇고 너무 메말라도 살기는 어렵다.
내가 보고 기억한 것은 과학적 논리적 맹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독과 고립에 관한 이야기다.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넘쳐났다 스러져도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할 때 그 제목이 생각난다. 자폭하고 싶을 때 더 생각난다. White Pale Dot, 하염없는 공간에 떠 있는 어떤 고적한 방 하나를 잠시 그려본다.

…나는 어디에서 너를 보았을까.

 

 

2005. 4. 17.

불멸

나무 끝의 부용화
산 속에서 붉은 봉오릴 터뜨렸네
개울가 집이라 적막하여 인적 없는데
어지러이 피었다간 또 지는구나
/신이오, 왕유
木末芙蓉花  목발부용화
山中發紅萼  산중발홍악
澗戶寂無人  간호적무인
紛紛開且落  분분개차락
/辛夷塢, 王維

 

그 이름을 기억하거나 외우고 간직하는 것만이 영속성을 보증하는 틀림없는 방법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 ㅡ 사람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 한 구절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럴 자격이 없을 때도 있고, 타고난 부끄러움 탓일 수도 있고, 어떤 가능한 방법도 없는 경우도 있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꽃이 피어난들 하나 같은 꽃이 없으며 어제의 그 꽃도 물론 아니다. 심지어 말로 꽃을 피움에야…

문득 3년여 전의 편지들을 찾아 hotmail에 들렀다가 나는 그 계정이 비워져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기억만을 복구하는 것이 싫어 애써 그것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j.j. cale의 어느 노래 가사에 관한 번역과 닭죽 요리에 관한 짧은 언급을 기억한다. 연꼿 속에서 나비가 날아오르는 보색대비의 그림과 옷걸이 속에 펼쳐진 영상들, 그리고 모질게도 힘들었던 어느 하루에 관한 푸념도 기억한다.
나는 상심하고 심란한 마음이 되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머리맡에 있던 보르헤스의 책을 뒤적이며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에서 그리고 <알렙>에서 내 마음 같은 글을 이미 보았기에 불멸에 관한 그의 간결한 생각과 겸손함이 약간의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였다.

위대한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과 똑같이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고 말하는 그의 강의는 철학적이기도 하거니와 사적이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정치적 평등에까지 이르는 함축적인 이야기였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아카사 기록처럼 우주적인 규모의 ‘백업 장치’이건 혹은 내 마음 속의 ‘운항기록계’이건 혹은 보르헤스의 <과학에 대한 열정>에서처럼 ‘그 자체’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그 자체가 어떻게 황폐해졌는지 다들 알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대체 왜 존재의 증명을 요구해야 한단 말인가. 내 안에는 당신에 관한 보다 명백한 증거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르헤스를 뒤적였다고 해서 전적으로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약간의 ‘척’이라도 할 수는 있다. 지금은 그것만이라도 필요하고 그것으로라도 족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2003. 10. 17.
+<불멸>, 보르헤스 강연집

 

델리아에게 전하는 인사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 보르헤스

 

 

바람도 선선한 가을날입니다. 늘 다니던 길에서 새로운 가게 하나를 발견한 것처럼 늘 보던 화단에서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나무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델리아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새로운 느낌, 오래도록 여기저기 뒤적여 왔으나 너무 짧은 글이어서 그냥 무심하게 넘어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헤매이면서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을지요.

내 기억 속에도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어디쯤에서 헤어졌는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나 자신이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듯 Flashback의 느낌을 갖곤 합니다. 그의 짧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11번가의 모퉁이는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아스라한 순간이 남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내 마음의 잔상은 흔들리며 흐릿해지곤 합니다. 죽음이 지닌 감당키 힘든 위력 가운데 하나 ㅡ 그가  말한 ‘거짓 기억’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상이 흔들리는 것일 뿐, 그것은 그 글자의 본래적 의미처럼 이미지가 아닌 것이어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무엇이 있습니다. 아마 그가 붙들고자 하였던 델리아의 본질도 분명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울리카>에서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영원이란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짧은 글을 통해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를 내 빈약한 가슴속에 깊이 깊이 각인시켰습니다.

지구 저 반대편에서 수십년 전에 존재했던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사연에 전도되어 11번가의 모퉁이를 바라보는 이 느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지요. 하나같이 너무 구차한 사족인 것만 같아 두 페이지에 불과한 델리아의 이야기를 내 마음의 카메라에 수없이 담고 또 담아봅니다.
Some sunny day… 어딘지 언제인지 알지 못하지만 다시 만나리라던 비러 린의 노래가 꼭 그러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한 부분+ ㅡ 나도 더불어 비러 린에게, 스탠리 큐브릭에게, 보르헤스에게, 그리고 델리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는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사가 없어도 분명 그랬을테지요.

 

델리아, 언젠가 우리는 다시 서로 이어지게 되리라.
어느 강가에서?
이 불확정적인 말,
우리는 한때 우리가 평원 속에 묻혀 있는 한 도시 속에서
정말로 보르헤스와 델리아였는지 자문해 보게 되리라.
ㅡ JLB.

 

 

+마르띤 삐에로.

 

 

/2003. 9. 26.

엘리제를 위하여

: 만돌이의 엘러지(Jealous Guy)

 

국민학교 6학년때 만돌이는 머슴이었습니다. 그때 키가 좀 크기도 했습니다만, 담임선생님은 시골에서 전학 오고, 키가 큰 아이들을 4명 뽑았습니다. 만돌이처럼 밀양에서 전학온 친구도 하나 있었고, 나머지 두 친구도 모두 고향 잃은 아이들이었습니다.(연필을 참 예쁘게 잘 깎는 친구도 있었고, 필기할 때 연필 아래에 자를 대고 ㄴ이나 ㄹ을 희안하게 편하고 재미있게 그어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담임은 학교 내의 온실, 화단에 관한 관리책임자였고, 우리는 그의 머슴이 된 것입니다.(사실 만돌이는 시골에서 전학왔지만 게으른데다 별로 일은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체력도 꽝이었지요.) 그는 칭찬 보다는 일하기 싫어하는 우리를 꾸짖어가며 볶아댔고, 거의 날마다 화단에서 잡초를 뽑으며 온실도 관리하던 우리들이 바로 그의 잡초였습니다.(완전히 “The Wall”입니다.) 죽은 비둘기를 발견하고 우리 ‘머슴애들’이 묻어준 기억도 있으며, 졸업식날에서야 학교에 오신 어머니께 “왜 좀 자주 오시지 않고…” 하던 담임선생님의 야비한 말투가 아직 생각납니다.

어쨌거나 그 피곤한 머슴살이에 시달리면서 부산 와서 처음으로 과외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집안의 과외선생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선생님(DJ)의 집은 아주 조그만 2층 판자집이었고, 길 곁에는 복개되지 않은 하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돌이는 천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SH였습니다.

만돌이는 머슴이었고, 그녀는 전교부회장이었는데 과외수업에서 만난 것이었습니다. 아마 더 좋은 곳에서 과외공부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집이 워낙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리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집은 공교롭게도 예식장이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 운동장에서 우러러보던 그녀였습니다. 왜냐면 그녀는 부회장으로서 애국가를 할 때마다 흰 장갑을 끼고 나와 지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지휘하는 애국가를 따라 부른다는 것은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성스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바로 탁자 하나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같이 이야기 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머슴 만돌이로서는 가슴 아려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다니는 피아노 교습소 역시 바로 맞은편에 있었는데 만돌이는 그녀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돌이는 베토벤이 아닌 머슴이었습니다만,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그야말로 엘리제의 것이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렇게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 자신이 나의 엘리제였습니다.

만돌이는 그녀의 피아노를 듣기 위하여 몇시간씩이나 일찍 과외선생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볼 때까지 그녀의 피아노 소리를 들었습니다. 판자집 2층의 아주 작은 창으로 보이던 피아노 교습소가 지금도 눈에 선한 것 같습니다.

우리 6학년의 과외시간 전에는 1학년의 수업이 있었고, 만돌이는 그 1학년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아이들(물론 만돌이도 아이였지만)은 만돌이를 ‘삼촌’이라 불렀고, 무척이나 잘 따랐습니다. 이창진, 장??(장진호였던것 같습니다) 이런 아이들 이름이 생각납니다. 진호는 나중에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가진 돈 탈탈 털어 아이스크림 사줬던 것이 아직 기억에 있습니다. 그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마냥 즐거워했지만, 만돌이는 그가 영영 기억하지 못할 이별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두들 참 보고 싶습니다. 지금쯤은 스물 여덟, 아홉쯤 되었을테고 아마 다들 나보다 어른들일 것입니다.

DJ 선생님의 동생뻘로서 ‘조교’로 활동하던 ‘빤쭈아저씨’도 있었는데, 만돌이는 그에게서 버스 안에서 물건 파는 만담을 열심히 배워 써먹을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도 않은 ‘쌍권총은 두개다’라든가 ‘라이타돌에 맞아죽은 사나이’ 같은 희한한 소재들이었습니다. “차 안에 계시는 신사 숙녀 여러분, 흔들리는 차 속에서 잠시 말씀 드리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만돌이는 그 이야기들이 너무 좋아 수첩에 적어놓고 달달 외우고 다녔습니다.

어쨌거나 만돌이는 SH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그녀와의 신분적 차이는 너무도 큰 것이어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학교엘 가면 SH와 몇반 반장이 좋아한다더라 같은 가슴 아픈 소문들만 들었습니다. 만돌이는 반장은 커녕 분단장도 아닌, 아침마다 남보다 일찍 나와 낫을 들고 밭을 가는 촌놈 머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돌이는 그녀를 보는 것만 해도 행복하였습니다.(“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냐”던 만돌이와 비슷한 성을 가진 만적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당연히 알지 못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들 공부가 게으르다고 꾸짖던 과외 선생님이 드디어 매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고, 틀린 갯수대로 때릴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재미있고 괜찮은 분이었습니다. 같이 폭음탄 만들다 만돌이 손에 제법 심한 화상을 입은 적이 있긴 했습니다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님 또한 좋은 분으로 만돌이를 손자같이 대해주셨습니다. 나는 그 할머니의 사시가 무섭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드디어 시험을 보았습니다. 만돌이는 문제를 풀면서도 SH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녀가 틀리면 어쩌나, 그녀가 만약 맞게 된다면…… 운명의 시간, 시험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원은 아랑곳없이 SH도 제법 여러 문제를 틀려서 맞게 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만돌이는 구제불능, 귀가 빨개진채 엉덩이를 팍팍 맞았습니다. 그리고 SH가 손바닥을 맞는 일생일대의 비극적 장면을 과연 제대로 보아낼 수나 있을까 걱정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가호가 있었을까… DJ 선생님 왈, 여학생은 때리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돌이는 진심으로 마음으로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바로 그 순간 전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왜 여학생은 때리지 않나요?”

‘들킨 마음의 두려움’과 약간의 질투도 있었나 봅니다. 순간 선생님 또한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고, SH 역시 난감하고 슬픈 표정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순간 얼어붙어버린 만돌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탓인지 아니면 만돌이 말에 마음이 상한 탓인지 DJ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매를 들고 SH의 손바닥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그녀가 몇대의 매를 맞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힘든 것이었는지, 또 그녀보다 몇백배나 더한 아픔을 만돌이가 받고 있음을 누가 알고 느낄 수 있었을까요. 그 고통스런 느낌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고, 하소연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 속이 시원하냐?”던 DJ 선생님의 말이 내 가슴을 베고 지나갔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I was swallowing my pain, I was swallowing my pain… I didn’t mean to hurt you…” 내가 만약 그때 Jealous Guy를 알았다면 그 노래를 수천, 수만번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똑같은 어린 마음의 독백이 끊임없이 가슴속을 흐를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변함없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만돌이의 마음속을 흘러갔지만 꼭 그 노래의 마디 만큼의 깊은 상처를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그녀와 예전처럼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끝.

 

/1999. 1. 4.

 

+SH는 “승희”, “이승희”입니다. 초등학교 졸업후 본 적도 없고, 소식 들은 적도 없지만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긴 합니다. 그녀의 집이 있던 건물은 아직 남아 있지만 물론 예식장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