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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기적

금강경에 관한 어느 책에서 승조 스님의 일화를 보았다. 환속하여 재상이 되기를 바라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한 까닭에 죽음을 당하게 된 그는 마지막 칠일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궤뚫은 <보장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스님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보르헤스를 생각나게 했다. <허구들>에 실린 단편  ‘비밀의 기적’이 그랬다. 사형을 기다리는 8시 44분에서 9시 사이, 그리고 격발의 순간에서부터 총알이 자신을 뚫고 지나가기까지의 찰나를 1년의 시간으로 연장시키며 자로미르 홀라딕은 필생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9시 2분, 창작의 희열 속에 그는 죽었다.

그리고 또다른 이야기들도 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관한 회상이라고나 할까… 스파이크 리의 <25시>에는 수감을 앞둔 주인공 몬티의 행복한 미래의 삶이 꿈처럼 이어진다. 가석방을 마치고 7년의 형기를 채우기 위해 교도소로 가는 길,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속에서 그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아버지의 계획과 선택을 따라 교도소로 가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다. 그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고 옛 사랑을 다시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교도소로 가는 길에 꾸었던 짧은 꿈이었다. 그는 반성하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고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환영 속에서 잠깐 현실을 잊었을 뿐이다.

 

25

 

또 필립 K.딕의 단편 ‘냉동여행’은 반대로 크고 작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에 사로잡혀 무한한 고초를 겪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광속 여행의 와중에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광년의 거리와 시간을 과거의 잘못과 고통들을 반추하며 보내는 것이다.

 

playboy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비밀의 기적과 고통의 무한반복이라는 극단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지점들이 있다. 내가 알거나 들었거나 전혀 모르는 비슷한 수많은 사연들이 거기 있을 것이다. 焉敢生心 , 홀라딕이나 승조 스님의 이야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게으름과 무기력을 물리친다면 소소한 몇 페이지 일기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밀의 기적’의 서두에 적절하게 인용된 코란의 구절 역시 이들 모든 이야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를 100년 동안 죽게 한 다음
그를 살려냈고,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ㅡ 너는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는가?
ㅡ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 또는 지상에서의 매미의 일주일 같은 삶의 길이는 찰나에서 거의 무한에 이르기까지 다른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승조 스님이 남긴 열반송을 사족처럼 여기 덧붙여 본다.

 

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五陰本來空  다섯 가지는 본래부터 비어 있었네
將頭臨白刀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
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베는 일과 같을 뿐이네

(‘사대’는 세상 만물을 이루고 있는 흙, 물, 불, 바람의 4원소를 의미하며 ‘다섯 가지’는 생멸과 변화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을 상징하며 그 각각은 물질, 감각, 지각, 마음의 작용, 마음을 의미한다.)

 

 

mister.yⓒmisterycase.com, 2009.

이제사 밝혀지는 수요일의 진실

 

  • 수요일과 관련하여 긴 세월에 걸쳐 소소한 글을 몇번 썼었고 몇해 전엔 거의 완결의 의미로 <이제사 밝혀지는 수요일의 진실>을 썼었다. 그런데 ‘웬즈데이 차일드’에 관한 또 한번의 반전이 있어서 원래 글을 그대로 옮기고 끝에 사족을 달았다.

 

‘Wednesday’s child is a child of woe.
Wednesday’s child cries alone, I know.
When you smiled, just for me you smiled,
For awhile I forgot I was Wednesday’s child.

 

소니 카세트의 라디오 밴드 불빛이 캄캄한 방의 한 벽을 환히 밝히던 시절, 전파상 유리문에 ‘라듸오’라는 글자가 촌스럽게 붙어 있던 시절 웬즈데이 차일드를 들었다. 첩보영화의 테마라고 했으나 그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살짝 신파조가 느껴지는 곡조며 가사가 심금을 울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트레몰로 느낌이 나는 연주까지도.

그리고 어느 날 내 음력 생일을 양력으로 환산해봤더니 19XX년 어느 여름날의 수요일이었다. 그래… 나는 그 노래 가사에 딱 어울리는 웬즈데이즈 차일드였구나. 피치 못할 운명처럼 “본 투 비 얼론”이라던. 그녀의 품에서만 웬즈데이즈 차일드임을 잠시 잊는다던. 그래서 수요일은 나름 내 삶의 어떤 상징 가운데 하나처럼 여겨지곤 했다.

웬즈데이즈 차일드가 테마곡으로 사용되었던 영화 제목 같은 “(퀼러) 메모랜덤”이 아니라 제멋대로 골라잡는 “미스터리 랜덤 메모리”였던 것일까. 몇 해 전 어느 날 수요일에 관한 어떤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생각의 끝이 어딘지를 확실히 집어내고 나니 여태 내가 왜 그 엄연한 사실을 거의 잊어버린 채 편한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오히려 신기할 노릇이었다.

 

The Quiller Memorandum (1966) - IMDb

 

외가 동네에서 태어난 나는 외할아버지께서 그 다음 날을 생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그리 바꾸었던 것이고, 그것을 고려해서 계산해보니 실제로 내가 태어난 날은 화요일이었다. (양력으론 틀림없이 ‘쥴라이 모닝’이다.) 지금도 여전히 외조부께서 정하신 그 날을 생일로 하고 있으나 내가 태어난 날이 화요일인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그저 스스로의 못난 심사 또는 그 참담한 결과물을 그렇게 갖다 붙이고 싶었던지도.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수요일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이도 아니건만 신성로마제국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와도 별 관련이 없듯, 잉글리시 혼이 잉글리시와도 혼과도 별로 상관이 없는 오보에의 한 종류이듯(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 범양사) 그 날이 ‘스윗 튜즈데이 모닝’이든 아니든 어떤 이가 웬즈데이 차일드란 실없는 믿음 내지 현실은 딱히, 그리고 딱하게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Now you’re gone, well I should have known,
I am Wednesday’s child, born to be alone.

 

/2013. 7. 11. 0:41 (“화이트룸”에서).

 

  • 그런데 다시 한번 반전이 있었다. 모친에게 정확히 알아본 바, 내 기억과는 정반대로 본래 수요일이었는데 음력 생일을 그 다음 날이 아닌 하루 전으로 앞당겨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외손자가 훗날에 겪을 ‘孤’와 ‘苦’를 헤아리셔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수요일이라고 한다. 그 누구의 품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한 줄처럼, “For a while I forgot I was Wednesday’s child.”였다.  / 2016. 7. 12.

 

 

+
상징적인 의미에서나마 웬즈데이 차일드를 면하고자……
(어차피 음력으로 생일을 한다보니 제 날짜는 절대 아니다)
올해는 외할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날로 지낼 생각이다.

장사익 모친의 한수

장사익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리 열심히 노랠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분 이야기 나오면 빠짐없이 보는 편이다. 나 같은 이가 배울 점이 많아서 더 그렇다.

이분 주름살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나오던데 노래하는 모습은 어쩐지 까이따노 벨로주와 비슷한 뭔가가 있는 느낌이다. 주름살도 그렇고. 어떤 다른 길을 갔다고 하더라도 결국 노래를 하게 될 사람들이었다고나 할까.

그의 모친께서 아들 서울로 보내고 딱 한번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데 짧은 그 내용이 그대로 시였다.

내가 열여덟에 읽었으나 결고 잊혀지지 않는 (이후로 본 적이 없어 제목도 잊었고 내용도 까마득히 잊었다!) 석주명의 나비에 관한 짧은 에세이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있으니 말할 필요도 말할 수도 없는 당연하고도 깊디 깊은 감정 말이다.

 

                      볍모가지가 나풀나풀한데
                      건강 조심허구 맛난 거 사먹어라

 

모친께서 글자에 서툴렀다고 했으니 ‘형언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더더욱 짧은 줄에 담아 표현해야 했었나 보다.

그래서 이 글은 참으로 많은 생각 끝에 나온 두 줄이고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질 수 있는 많은 느낌과 사연의 필연적이고도 절박한 함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느낌으론 광화문에서 우리 동네 초등학교 앞에까지 걸려 있는 몇몇 짧은 시편들에 결코 부족하지는 않다 싶었다.

어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보고 읽고 듣고 느끼는 이에게는 시가 아니어도 틀림없는 시인 것이다. 이게 왜 시냐고/시가 아니냐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불변이며, 나의 아주 작은 시론은 그렇다.
…내 마음이 변치 않는 한.

 

+

기자 또한 당연히 그 글을 시처럼 느끼기는 했으나 마지막 문장으로 볼 때 그의 느낌은 그저 ‘시적 표현’으로 여긴 듯한 느낌이 든다. “볍모가지가 나풀나풀 할 것 같은 오후”란 표현으로 글을 끝맺은 것이 그랬다. 그것은 모친의 많은 생각이 담겨 있는 한 줄을 단순히 ‘가을’이라는 시점으로만 환원시켜버릴 소지가 있는 것이었기에 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2015. 10. 26.

million miles from

하늘을 향한 트럼펫, 뺨으로 흘러내리는 땀……
크기 때문이었을까.​
검어서 더 휘황해 보였던 흑백 텔레비젼 속 금관악기의 번쩍임처럼
기억속 그 사진의 검은 부분은 보다 더 검었고 한참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 사람이 아주 좋았던 적은 없었다.
이것저것 구경꾼 마냥 조금 들어보았을 뿐, 음악에 대해서도 잘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 본 사진으로부터 많은 기억들이 다시, 또다시 내게로 왔다.
아주 커다란 흑백 사진의 액자가 모퉁이 세워져 있던 방과
생각하면 들려오는 듯한 뮤트된 트럼펫 소리.

​알래스카 상공이었던가 모르겠다.
까마득한 저 아래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고
어둠 속 아주 작은 불빛들이 꿈의 조각처럼 드문드문 보였다.
밤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작은 창 아래로 보인 그 풍경들은
나로선 영영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도착했던 방이 이제는 그 천길 만길 아득했던
설원의 불빛과도 비할 수 없이 먼 곳이 되었다.
그 방을 생각하면, 그때 느꼈던 고적감이나
잠시도 참기 어려웠던 칼날 같은 추위에조차 온기가 느껴지곤 한다.
오래 전 그 방에서 사라진 포스터 대신,
사라져버린 방과 그 방의 주인 대신 소리는 남아 여전히 맴돌고 있다.

​아직 다 보내지 못한 텅 빈 세월이 먼저 만들어낸 소금의 기둥이었을까.​
쓸어담을 수도 꺼낼 수도 없는 지난 날의 느낌들을
기꺼이 고쳐가며 나는 하염없이 돌아보곤 한다.
닿지 못할 아득한 불빛들을, 그 가운데 오직 하나를.

 

 

 

 

/2016. 1. 4., 미음리을.

 

whispering in my ear

2009년의 마지막 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역에선가 황급히 일어나던 아저씨 주머니에서 열쇠가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그것을 본 듯 싶었다. 출구를 향해 달려가던 분을 불렀으나 못들었는지 그냥 가시기에 목소리를 좀 더 올려 열쇠가 떨어진 것을 알려줬다.(이럴 경우 부르는 사람이 더 부담스럽고 무안한 느낌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나이를 먹으면 이런 부끄러움 자체가 부끄러운 일인데도 그쪽으로는 도대체가 발전이 없는 인생이다.)

듬성듬성 자리가 빈 객차의 맞은편에는 살짝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아가씨 내지 아주머니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복장에다 70년대 단발머리 같은 촌스런 머리에 촌스런 머리핀을 아무렇게나 꽂고 있었다. 거기다 몇번씩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통에 나는 괜스레 시선을 다른데로 돌려야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시내에서 내렸고, 자리는 점점 더 여유가 많아졌다. 어느 순간 그녀가 갑작스레 내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더니 잠시 눈치를 살피다 귀에다 대고 말을 걸었다. 그녀의 표정이나 복장과는 달라 보이는 멀쩡한 목소리며 억양이었다.

당황한 탓에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있다 또다른 이야기를 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던 순간 유리창에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으나 그녀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처음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진주 쪽에서 왔는데 차에서 졸다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오빠가 모텔에서 재워주면 안되나요? 갈 데가 없어 하루종일 지하철만 타고 있어요.”3분쯤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차비에 보태도록 2천원만 주시면 안되나요?”. 그게 일종의 수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해의 저녁은 그렇게 저물었고 열쇠를 잃어버린 어떤 고단한 삶이 한참을 내 귀속에 머물러 있었다. 귀(ear) 또는 누군가의 세월(year) 속에.

 

/2010. 1. 2. 19:28 

내 마음의 고장

지난 여름에 이어 다시 한번 경주를 다녀왔다. 연꽃이 만개했던 연못은 가뭄 탓인지 바닥을 보였고, 새카맣게 말라버린 연밥은 고장난 전화기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느 누군가도 비슷하니 그렇게 살고 있다.

별은 그토록 낮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던지 꿈은 나날이 터무니없이 졸아들었으나 월성과 계림의 풀밭과 숲은 계절을 느끼며 걷고 즐기기에 충분하였다.
‘덕만’의 시대는 험난하였다는데 분황사와 첨성대, 황룡사 목탑이 모두 그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경주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구빗길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강원의 준령 사이를 달리는 것처럼 상쾌하였고 회로 유명하다는 감포 해변은 좀 허술하고 깔끔하지 못했다.

수중릉의 주인에게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죄과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축생의 과보’도 마다하지 않겠노라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하니 묘한 동조가 일었다.

해변에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뭔지 모를 방식으로 기도하는 무속인들도 제법 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길게 늘어뜨린 하얀 천을 몸에 감아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씻고 털어내는 시늉을 하더니 그것들을 바다를 향해 날려보내곤 했다. 아득하게 북소리도 가끔 들렸다.

어쩌면 예만자 여신을 찾는 살바도르의 해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바다에서 죽는 것은 달콤한 일이라던 바이아의 영원한 水夫 까이미의 노래도 생각이 났다. 밤하늘 바다 위의 별은 예만자의 보석(은과 금)이라던. 때늦은 가을 바람에 나즈막한 낭산 기슭 다시 한번 걷고 싶어진다.

 

홀아비는 미녀를 꿈꾸고
도적은 보물창고를 꿈꾸는구나
어찌하면 가을 맑은 밤 꿈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경에 이를거나 (일연).

 

 

/2008. 10. 30. 0:13

메추리 요리 / 시스템 복원

<초고속 승진을 시킨 마술>에서 가장 절묘한 것은 ‘메추리를 재료로 하는 저녁 요리’라는 복선이다. 마술을 시작하는 시점에 등장하는 “메추리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만들지 말라”는 언급은 나중에 마법을 취소시키는 장치로 사용된다.

그것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복선 내지 스위치가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에도 포함되어 있다. 윈도 xp, 비스타 등의 <시스템 도구> 항목에 있는 <시스템 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시스템 복원’은 운영체계가 스스로 일정 시간마다 복원 시점을 만들어 (혹은 사용자가 수동으로 복원 시점을 만들어)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거나 예기치 못한 문제를 발생시킬 때 그 이전의 특정한 시점으로 컴퓨터 환경을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메추리 저녁식사’는 마법사와 신부의 삶에 있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마법사가 만들어둔 일종의 복원시점 같은 것이었고, 유저(마법사)의 입장에서 원치 않은 상황을 초래한 신부의 초고속 승진은 “메추리로 저녁 식사를 만들라”는 ‘시스템 복원 명령’에 의해 그 시점으로 돌아가버렸고 교황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했던 마법은 덩달아 ‘언인스톨’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에도 ‘시스템 복원’에 대해 무엇인가 글 썼던 것을 기억한다. 내 삶에 그런 시점을 설정할 수 있다면 어디쯤일까에 관해서도. 옛노래 그린 필즈에서 늘 마음을 저리게 했던 구절 역시 가능하지 않은 ‘복원’에 관한 대목이었다.
월명리의 전설 또한 이야기 또한 복원할 수 없는 무엇에 관한, 어떤 길에 관한 생각이었다.
메추리로 저녁 식사를 할 수 없는 삶, 복원 기능이 없는 삶에 있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스위치는 어쩌면 ‘현재 그 자체’일 것이다.

참고로 <초고속 승진을 시킨 마술>을 비롯한 <불한당들의 세계사> 수록 작품 대부분은 보르헤스 자신의 순수 창작이 아니라 세계 각처의 기록과 전승, 작품에 관한 ‘다시쓰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2008. 8.16. 13:22.

 

 

 

+
시스템 복원(system restore)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me, xp, 비스타, win7~10의 운영체제에서
시스템 파일, 레지스트리 키, 설치된 프로그램 등을 특정 시점의 상태로 되돌리는 시스템 도구.

보조프로그램-시스템도구-시스템복원.(win7 기준).

 

월명리

날씨는 버거울만치 무더웠고 길은 여기저기 정체가 심했다. 박물관은 그 본래의 기능과는 별 관련이 없는 무질서와 무례, 그리고 카메라 플래쉬의 경연을 관람하기 위한 장소처럼 보였다.
경주엘 잠시 다녀왔다. 집안의 일도 좀 보고 그리고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어느 옛 스님이 즐겨 피리를 불고 시를 읊었다던 장소를 찾아갔다.

천년고도에 관광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천왕사터 도로변에는 안내판조차 제대로 없었고 믿었던(?) 네비게이션도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지는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장소에는 당간지주만 휑하니 서있었을 뿐,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도 발굴관계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휴일이어서 그런지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덕만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여왕의 능이 근처에 있는 까닭에 옛 절터의 전망이라도 볼 수 있을까 막연한 요행수를 바라며 무작정 샛길로 해서 언덕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산을 올랐다. 전날 무릎을 좀 다쳤으나 그 순간에는 불편한줄도 잘 몰랐다. 땀 뻘뻘 흘리며 5분쯤 쉬지 않고 걸었더니 거의 꼭대기 가까이에 이르렀고 시원한 바람이 좀 부는가 싶더니 금세 왕릉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왕의 무덤은 상당히 큰 크기였으나 기단부의 거친 돌에서 보듯 대체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왕릉에 세워져 있는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에 만들라고 했으며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신하들이 위치를 물었더니 낭산 기슭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낭산 기슭에 영면한지 10여년 후에(일반적으로는 이와 달리 문무왕 19년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 아래쪽 넓은 터에 사천왕사가 들어섰다고 한다.

<유사>에 이르기를, 도리천이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사천왕이 머무는 곳 위에 있다고 하니 여왕의 무덤이라는 결과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곳의 존재를 증명해줄 근거가 뒤늦게 자리를 잡았다고나 할까… 없는 향기로 해서 더 깊은 향을 보여주었던 옛 여왕의 전설이었다.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산 중턱에는 용을 든 증장천왕, 검을 쥔 지국천왕, 비파를 갖고 있는 다문천왕, 왼손에 탑을 든 광목천왕으로 불리우는 사대천왕이 머물러 도리천을 지킨다.)

결과와 원인의 미묘한 역전 때문이었을까. (내용은 좀 다르지만) 왕릉과 사천왕사에 얽힌 이야기는 묘하게도 보르헤스의 <초고속 승진을 시킨 마술>이란 단편을 생각나게 했다. 천일야화의 외전에 실렸던 이야기를 보르헤스가 ‘다시 쓴’ 것이다.
저녁 식사를 앞둔 어느 마법사의 힘으로 순식간에 신부에서 교황까지 이른 어떤 사람이 (마법을 행하기전 마법사는 저녁식사로 메추리 요리를 먹고 싶으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만들지 말라고 명한다) 약속을 저버리고 마법사의 부탁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자 (돌아갈 때 먹을 음식을 부탁하자 그마저도 주지 않겠다고 한다) 마법사는 메추리 요리를 만들라는 분부를 내리고 모든 일은 처음대로 돌아와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부덕함만 마법사에게 속속들이 보여준 결과, 모든 것은 처음으로 와서 신부는 일언지하에 쫓겨난다. 도리천과 사천왕사,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역전에 대해 생각하며 능에서 내려오는 길에 검은 물잠자리 한 마리가 내 앞의 풀꽃을 오가며 한참을 따라 날아왔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 생각하며 잠시 둘러봤을 뿐인 낭산은 거문고 타던 백결선생이 거처했던 곳이고, 최치원이 책을 읽던 장소이며 월명사가 ― 도리천에 이루어진 옛 여왕의 영면처럼 원인에 앞선 ‘결과’로 느껴지는 ― 불멸의 시를 썼으리라 여겨지는 곳이다.
마법사의 저녁 요리와 같이 이미 이루어진 결과를 돌이킬 수 있는 어떤 주문, 어떤 ‘문두루’도 없기에 월명리는 여태 지도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경주 어느 마을의 이름이다. 바람결에 글 몇줄 새길 날 기약하며 홀로 그리고 또 그려보는.

(돌아오는 길에는 안압지 부근에서 연꽃 구경을 했다. 옷걸이 속에 연밥이 그려져 있던 일련의 그림들과 더불어 수화기처럼, 혹은 송화기처럼 생긴 연밥 보면 늘 어떤 불가해한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월명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떠난 누이의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 소리는 밝은 달 일깨워 항아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一然 讚)

 

 

/2008. 8.12. 19:11

 

 

 

믿어 의심치 않는 어떤 미래에 대한 사소한 기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은 벚꽃나무로 무성하다. 이제는 2차선 도로를 마주하고 선 나무들이 봄날이면 터널을 이룰 정도로 자랐으니 어느 계절이나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런 거리다. 가을은 가을대로 단출한 운치가 있고, 봄날에는 어떤 벚꽃길보다도 소박하고 요란스럽지 않아서 좋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늘 “여름날의 푸른 잎새들”이란 옛 노래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그런 길이다.

아파트의 제일 중심에는 그리 크지 않은 2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고, 그곳엔 이발소와 과일가게와 슈퍼와 치킨집, 그리고 식당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낡고 조용한 이 곳에서 유일하게 조금은 붐비는 곳이 바로 여기다. 상가라고 해도 큰 건물도 아니고 아직은 주차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서 이발하러 오는 사람들도 가끔은 상가 앞에 주차를 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은 아무래도 슈퍼다. 하루의 절반 가량을 보내며 먹고 쉬고 자는 이 곳에 슈퍼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년에 불과 몇 번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곳이 바로 거기일 것이다. 하지만 말이 슈퍼지 이발용 의자가 둘 놓여 있는 이발소나 바로 곁의 과일가게의 두 배 정도 되는 점포일 뿐이다.
그 슈퍼에는 아파트 단지 아래쪽의 술집거리로 술을 배달하는데 사용하는 자전거 하나가 슈퍼가 열려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세워져 있다.

말했다시피 차량 통행이 적어서인지 차의 통행에 큰 지장이 없는 탓인지 자전거는 길 방향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핸들과 바퀴의 방향이 슈퍼의 정문과 일직선으로 해서 세워져 있다. 마치 비상상황을 위해 대기중인 순찰차처럼 주인아저씨의 변함없는 머리 스타일과 그 길이처럼 365일 어느 날이나 결코 변함없이 그렇게이다.
하지만 어쩌다 운전을 하면 습관처럼 나는 움직이게 된다.

과속방지턱도 없는 그곳 ― 슈퍼 앞을 지날 적이면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게끔 되어 있는데, 왕복 2차선의 도로에서 자전거를 피해서 가려면 당연히 맞은편 차선을 절반 가량은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지 큰 불편도 아니고, 통행이 크게 지장을 받을 정도도 아니니까 아주 잠깐 핸들을 왼편으로 돌려주면 그만일 뿐이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사소한 동작을 그곳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일년에 수만 번 또는 수십만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전거와 관련하여, 아직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세계에 관해 감히 말할 수 있다. 만약 부지런하고 마음좋은 주인 아저씨가 스스로 자전거를 90도 돌려서(정확한 90도는 아니어도 근사값은 되어야 한다!) 세워두는 어떤 날이 오고, 그 이후 그렇게 지속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또는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가장 그리는 같고도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유사하거나 전혀 다른 수많은 방법들에 관해 비슷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정확히 실행된 적은 없다.

 

/2007. 7. 20

 

 

+
이 글을 쓴 몇해 뒤 슈퍼는 다른 사람에게 인수되었다. 새로운 주인은 더 이상 자전거 배달을 하지 않게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많은 기회 가운데 하나는 사라져버렸다. 그런 ‘기회’는 수없이 많이 있으나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은 내가 다니는 육교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는데 자전거보다 훨씬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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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처럼 달아뒀던 오토바이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왜냐면 그 오토바이가 있는 쪽으로 나 있던 큰 육교 한 가지는 최근에 있었던 야구장 철거와 함께 잘려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꿈이 사라졌지만 꿈은 너무도 많다. 그것을 깨트리는 현실이 더 많은 것이 조금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2018. 10. 2.

 

믿지 못할 나의 금연기

: 그의 마지막 담배

 

사람들에게는 끊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마약, 도박, 음주, 연애, 인연, 담배 등등. 어떤 이는 그 가운데 하나에 그러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병을 한꺼번에 앓기도 한다. 

나는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끊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지독한 중독이었으나 별스레 특이한 방법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평범한 하루, 한껏 그것을 들이마신 채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심신에 모두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그 시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었는지 또는 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렇게 멈추어 있었으면 싶었다. 그 순간의 집중에 성공했기 때문에 중독을 끊었다고 믿는다면 그리 생각해도 좋다.

 

하늘 끝 길은 멀어 혼이 날아가기 힘들고
꿈속의 혼이 관산을 넘기 힘드니…
ㅡ 이백

 

담배의 경우는 또 그랬다. 하루 세갑을 피웠으며 그 사이의 꽤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담배 끊을 생각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담배끊기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내 경험상 그것은 어떤 계기가 있는 날(새해 첫날이나 생일날 등등)에 시작하는 것이 좋고, 가능한 한 많은 곳에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사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피우는 형태의 금연보조제도 상당한 도움이 되는데 그것은 맛이 너무 고약한 까닭이다. 나는 새해 첫날에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별하겠노라고 알렸고 그리고 그리 어렵지도 않게 그렇게 했다.

그 동안 비슷한 것과 가짜들과 엉뚱한 것들이 빈 자리를 차지하였고 어느 날엔가 중독은 내게로부터 사라졌다. 모든 것이 너무도 천천히, 그리고 아무런 뚜렷한 경계도 기약도 없이 시작되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스르르 끝이 났기에 이별에는 날짜도 없었다. 
그리움 또한 비슷하게 끊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그들 가운데 하나를 끊어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다. 그들 가운데 몇몇을 싹둑싹둑 잘라내고도 또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다. 

끊기 어려운 것은 끊기 어려운 것이고, 새로 무엇인가 끊기 어려운 것을 마음에 담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금연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 했으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담배끊은 인간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움에 관해서는 어떤 격언이 합당한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담배
사라진 연기 내 안에 가득하여…
(이 링크는 지워져 노래를 들을 수 없다.)

 

 

/2006.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