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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 걸 ◉

그녀가 ‘fatale’이 아니라 변변찮은 주변이……

 

예전 어느 새벽에 뒤척이다 깨어서 뭣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 채 한참을 봤다.
엊그제 또 졸다 깨다 그렇게 봤다. 영화가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다.
똑같은 ‘팩토리’는 아니지만 차라리 조금 뻔한 에릭 버든의 노래가 더 생각이 났다.
하지만 ‘femme fatale’의 주인공인 그녀 e.d.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작년 노벨상 수상자가 지닌 가끔의 목소리나 눈빛과 닮은 듯한 영화의 한 대목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고
‘factory’란 단어를 꽤 애용했던 어떤 변변찮은 이에 관해서도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내다 널 수 없는
여자의 마음이여
옷 너는 날
//지요니

 

 

팩토리 걸

 

책들의 운명

피치 못할 운명이 만들어낸 어떤 방이 있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거나 잃어버렸을 크게 다르지 않은 방이다. 애초에 책장이가 없던 그곳에 어느 날 나는 책을 가져다 둘 마음을 내었다. 그리고 책장을 마련하면 무슨 책들을 꽂을지 생각을 좀 했다. 전공이라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을 정도, 나는 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철학적인 것을 싫어한다기보다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조금 냉소적이었던 것 같다. 추리소설과 과학소설, 환상소설을 좋아했었고 천문학, 물리학이 보다 철학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그때 구입했던 관련서적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분야는 펼쳐본지 오래다. 아무튼 이런저런 변화를 거치며 어딘가에 좋아하는 시집과 좋아하는 작가의 (거의 전집에 가까운)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책장 한단 정도의 크기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두 개의 칸으로 된 얇다란 책꽂이를 하나씩 구입해서 틈나는대로 조립하고 쌓아 단출한 책장을 완성하였다. 게으르고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 하얀 책꽂이가 바래가며 연미색으로 바뀌어가는 세월에 대해 생각하며 조금 소박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장의 빈 자리에 전혀 엉뚱한 것들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래봤자 그다지 의미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찮은 내 꿈이 꼭 그만큼으로 하찮게 엉클어짐에 낙담했으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어느 날에는 조립해서 쌓아뒀던 책꽂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버렸고 튼튼하지만 아주 버겁게 생긴 큼지막한 책꽂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새하얀 나의 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전혀 다른 용도의 물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투박한 책꽂이에는 겨우 두세칸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꽂혀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에 점차 익숙해졌고 이  모두가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려니 했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무색하게도 더 투박하고 더 높아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가 새로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아끼는 책들은 모두 엉뚱한 장소로 옮겨져 있었다. 다시 한번 화를 참기 어려웠고 그 책들을 닥치는대로 끄집어내어 보따리를 쌌다. 어딘가 전혀 다른 곳에 그것들을 방치하기 위하여.  잃어버릴 수도 있고 쉽게 삭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려니 할 것이다. 그것에 관한 예감을 갖고 있었던지 언제부터인가 책을 갖기 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를 더 좋아하고 필요한 부분만 기억하는 것을 더 즐겨한다. 많은 것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겠지만 그것이 영원한 망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믿는다. 그리고 흩어져버린 책의 운명은 <애플비씨의 질서바른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질서는 무질서에 패했고 그 무질서는 자신의 잘못과 죄에서 비롯된 것임에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살아 있는 한 감내해야 할 죄값인지는 납득할 수 없지만, 책들이 나의 운명인지 흩어져버린 책꽂이가 나의 운명인지 천장까지 다다른 텅 빈 책장이 그러한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다.

 

+스탠리 엘린

 

잊었던 장소, 잊었던 그녀

엊그제, 갑자기 도서관엘 가고 싶어졌다. 적어도 두 계절 이상은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곳인데 갑자기 금단현상이라도 찾아온양 가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우리 안에 있고 그 밖은, 도서관은 자유가 넘쳐나는 잊혀진 세계 같았다.

여섯시가 되자마자 마땅히 빌릴 책도 생각지 않은 채 무작정 도서관을 향했다. 그날 도서관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했음에도 그랬다. 장서 정리를 위해서 3일간 휴관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첫날, 나는 어둠이 깔린 도서관 주변을 빙빙 돌다 고양이가 자리를 잡고 있는 벤치 옆에 잠시 앉았다 빈 손으로 돌아왔다.

어제는 재개관을 기다리며 몇권의 대출 리스트를 작성한 후 도서관 바로 옆 공원길을 잠시 산책하다 왔다. 그리고 오늘은 여섯시까지 참을 수가 없어 네시쯤에 자리를 비우고 도서관을 갔다. 책 몇권을 찾아서 무인대출기에 카드를 읽혔으나 비밀번호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데스크에 가서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책을 빌렸다.

민음사에서 나온 신간 두 권을 빌렸는데 책 장정이 참으로 불만스럽다. 이 유력한 출판사는 읽히는 책을 찍는 것이 아니라 카피하기 곤란한 형태의 책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듯 세로로 무지 홀쭉하여 펼치기 힘든 형태로 책을 만들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매번, 욕이 나올 만큼 불만스럽다. 정말이지 두 손으로 책을 잡지 않으면 읽기가 어려운 형태다. 어쩌면 책을 편히 읽기 위해서 카피라는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빌린 책 가운데는 <그 여자의 재즈 일기>가 있다. <그 남자의 재즈 일기>를 꽤 여러 번 읽었던 사람인지라 작년 언젠가도 이 책을 빌리려 애를 썼지만 (대출 가능하다고 나와 있음에도) 음악 섹션에서 그녀의 일기를 찾을 수가 없어 직원에게 문의도 했었다. 그때 여직원의 말인즉, 책이 이 서가 어딘가에 있는 것은 맞지만 아마도 전혀 다른 곳에 꽂혀 있는 듯 싶다. 언젠가 찾으면 연락 드리겠다고 했으나 나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까지의 3일 동안 도서 정리를 위해 휴관을 했다는 점에 근거하여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일기를 찾아 보았고 마침내 제자리에서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 몇 페이지 살펴보니 지나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의 일기를 더 알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무슨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어도 이러한 결말을 맞게 되리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펼치기 힘든 책 가운데 하나와 또다른 음악책은 내 잠자리를 즐겁게 해줄 것 같다. 뭔지 모를 허기를 책으로 때우고 도서관 자주 오가며 걷기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그래야 쓰겠고 쓸 것 같다.

에라티카 늬우스

“이어 ㅇㅇㅇ시인이 무대에 올라 윤동주 시를 낭송했다. 제목은…….”
(가을을 타고 흐르는 시 낭만을 깨우다, dy일보)

“민족시인 윤동주의 ‘ㅇㅇㅇㅇㅇㅇ’이라는 시가 있다.
세월의 가을이 아닌 인생의 가을을 노래한 것이어서 계절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시다.”
(ㄱㄱ신문)

 

모친 모시고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다. 폰을 들여다보다가 무엇이 궁금했던지 어느 친구분께서 보냈다는 카톡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핸들을 잡고 있던 나는 그분이 보내왔다는 윤동주의 시가 어떤 것일지 궁금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겨우 두어 줄을 읽었는데 나는 중단을 시키고 제목부터 물었다. 시작 부분만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게 윤동주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연한 이유의 가장 큰 근거는 그의 시를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제목의 시를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그게 내가 여태 알지 못한 그의 시라고 한다면 좀 떨어지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습작의 느낌이 풍기는. 그래서 나는 십중팔구,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씀을 드렸고 모친도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오늘 조금  자세히 찾아봤더니 역시나 그것은 윤동주의 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과 허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 있는 듯, 숱한 기사와 블로그에 너무도 자연스레 윤동주의 시로 소개되고 인용되고 있었다. 이 무슨 첨단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의 구현인지 기존 시인의 시와 그 시를 (윤동주의 작품으로 치부하며) 낭송회도 이루어지는 상황이었고, 이 시의 ‘진짜’ 지은이에 관한 작은 기사는 뒷전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일부 신문의 칼럼이나 기사에서조차도 이 시를 윤동주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인용하고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불명의 글들이 인터넷이나 sns를 떠돌며 지은이가 잘못 알려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와전이라는 것이 ‘종이신문’의 영역에서까지 검증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다 심각한 일이다. 한때 널리 읽혀졌던 스티브 잡스의 유언이라는 글처럼 그것이 터무니없는 와전이었음에도 그것을 걸러낼 ‘필터’가 없었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오작동은 경기에서 제주까지, 전국 팔도에 골고루 걸쳐 있었다.

게다가 이 시가 인터넷을 떠돌기 이전부터 (다른 어떤 분은 이 시를 그리도 사랑했던지) 원작자의 글을 마음대로 자기 이름으로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해서 현재의 제목 또한 지은이의 원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것을 ‘윤동주의 시’로 인용하며 칼럼을 쓴 분들이나 남의 시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분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기법으로 치자면 빛나던 옛시절의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들과 맞짱을 뜰만한 최상위 수준인 듯 싶다.

덧붙여 “이 시가 윤동주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은 그만큼 작품이 우수하다는 증거”라는 어떤 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지은이에게는 자신의 작품에 관한 소중한 권리가 있는 만큼 그에 관한 의혹 역시 명백하게 해소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황당한 저작권 덤태기(윤동주)와 침탈(원작자)에 관해 누가 웃고 누가 울어야 할지 조금은 헷갈리지만 말이다.

아주 가끔은 이와 같은 와전(물론 지은이에 의한 의도적인 와전)이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누구나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깊이와 진위를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사연들이 자신과 당신의 모습을 전혀 다른 무엇인가로 맞바꾸며 엉터리 같은 못난 세계를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무슨 빌어먹을 음모이론도 아닌데 진실은 저 너머(또는 이 링크 너머에~)에 있고 누군가는 자신이 결코 쓰지 않은 시의 떨떠름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도착하지 못한 꿈

냉동여행 Frozen Journey, 필립 K. 딕

 

▲ 그의 지난날
그의 이름은 빅터 케밍스다. 어릴 적에 도르키라는 이름을 지닌 고양이가 비둘기를 잡아먹도록 부추겼다. 네 살 때는 거미줄에 걸린 벌을 도와주려다 벌에게 쏘였으며, 마틴이라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화가의 친필서명이 적힌 꽤 값어치 있는 포스터 한 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보관했는지 아니면 찢어져버렸는지 불분명하다.

 

▲ 그의 오늘
새로운 행성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장거리 우주여행에 나섰으나 냉동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여 희미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주선에는 깨어서 생활할 만큼의 충분한 산소와 식량이 없는 까닭에 우주선의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과거를 반추하며 괴로워 하고 새행성에 도착할 가까운 미래의 환상을 접하며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 또 절망한다.

 

▲ 그의 내일
10년간의 끔찍스런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
또는 새로운 행성에서의 극적이고도 꿈같은 재회?

 
ARRIVE  ARRIVE3

 
필립 K. 딕 하면 영화의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블레이드 러너>(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토털 리콜>(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서 <임포스터>,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 첵>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그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진 까닭이다.(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정체성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냉동여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슐러 르 귄과 더불어 주류(?) 문학계에서도 거론되곤 하는 몇 안되는 SF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르 귄의 경우와 달리 그는 보다 ‘통상적인’ 형태를 취하곤 한다.

 

내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있어. 내 안에 말이야.
통증의 쓰라림. 무가치하다는 느낌.

 

애초에 그는 목표 행성까지 냉동수면 상태로 지냈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 여행 도중에 일부 의식이 깨어나버렸다. 불행히도 우주선에는 인간이 깨어서 생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우주선의 컴퓨터는 그를 수면 내지 가수면 상태로 유지하고자 애를 쓴다…..

그에게 닥친 부조리한 기억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곤 하지만 단 한번도 행복한 기억을 유추해내지 못한다. 우주선은 그에게 새 행성에 도착하는 시점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어 그에게 안도감을 주려 하지만 그마저도 번번이 그가 눈치채어버려 실패하곤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자그마한 잘못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태를 지속한다. 우주선 컴퓨터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격자처럼 엮어서 하나로 통합해놓은” 상태다.

우주선은 수많은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로봇의사를 보내고, 새 행성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곤 하지만 그의 예민하고 집요한 의식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제목을 살짝 고쳐서 이야기 하자면 안드로이드(우주선)는 끊임없이 전기양의 꿈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양의 꿈을 원했다.

 

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를 다시 영원히 냉동시켜 달라고 하자.
난 죄의식에 가득 찬 인간,
파괴할 줄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우주선은 결국 그의 아내를 호출하여 그가 새 행성에서 옛 아내를 다시 만나서 자신의 심적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었던 가상현실과 비슷한 형태로 새 행성에 도착해서 아내를 만나고 아내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다 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통해 그것이 꿈속의 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각성했던 그로서는 마틴이 새 행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현실의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냉동여행’도 그렇게 애매하게 끝을 맺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단편에 관해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빅터 케밍스처럼 정확한 해답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진정 깨어나서 아내 마틴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그 마지막 희망마저도 가짜이며,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마치 장주의 호접몽처럼 혼돈이 일어나는 순간이 온 것이고, 딕 자신의 다른 단편들에서처럼 자신이 과연 자기 자신인지, 현재가 그대로 현실인지에 대해 극심한 혼란에 부딪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한 인간의 모조품임을 결코 알아채지 못한 임포스터의 정교한 로봇처럼 꿈임을 알지 못하는 꿈이 무한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삶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블랙홀의 내부가 궁금하다면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된다던 어떤 이의 한줄처럼.

 

단편의 마지막은 어쩐지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는 포스터가 현실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찢어졌는지가 열쇠인데 그는 끝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서 혼란스럽게 한다. ‘플레이보이’를 통해 <냉동여행>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이 작품이 자신의 단편집에 실렸을 때의 제목은 <조만간 나는 도착하기를 희망한다>이라고 한다. 나도 진심으로 그랬으면 싶었다.

그리고 여기 이 단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화가 있다. 참으로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짧고도 길고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이야기의 모든 것이다.
케밍스의 고통은 끔찍스럽지만 도착지에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마틴의 말은 나를 부럽게 한다.

 

“…이것이 현실이면 좋을 텐데 말이오.”
마틴이 말했다.
“전 이 일이 당신에게 현실이 될 때까지 당신과 함께 앉아 있겠어요.”

i hope i shall arrive soon……

 

 

/2006.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