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그것은 유구한 팰럼세스트palimpsest에 두 존재의 이야기를 더하고 고쳐 쓰는 일 ―― 결국 잠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화장실 불을 켜니 아슬아슬한 문틈에 쌀나방 두 마리 죽은 듯 잠들은 듯 꽁지를 맞대고 있다 어떤 것은 삶이고 또 어떤 것은 시늉이다 /2019. 11. 2.
우리들 모여 밤새 이야기 나눌 적엔 화장실 가는 것도 미안하였지 그 마음 한 조각 달아난 자리 여태 깨어나지 못한 어느 행성의 눈부신 아침 별빛의 끝까지 어둠의 끝까지 아스라히 달려 다시 그날 밤 어떤 미안함도 없이 밤새 또 밤새 이야기 나눌 우리들의 다음 이 시간 + 이 시를 처음 쓴 것은 2009년이었다. 생각은 물론 2000년까지 […]
작은 상자 속 금관의 악기들이 흑백 텔레비젼 속에서 음을 올릴 적마다 검은 광휘을 발하던 시대 투박하게 치렁치렁하게 돌이킬 수 없이 막혀버린 커튼 너머 그 빛에 내가 혹하는 오늘 검은 빛에 둘러싸인 어딘지 모를 작은 상자 같은 곳 관을 잃어버린 악기가 적막을 토해내는 기막히게 멋진 밤 /2019. 10. 6.
거미줄 낀 화장실 낡은 창 너머 다세대 주택 지나 잠든 것처럼 주저앉은 옛집 위로 산복도로 가는 길 건너 노란 바탕에 붉고 푸른 글씨 할인마트 슈퍼 오래된 간판 하나 보인다. 셔터 내려진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가 갈 일은 별로 없는 길, 아마도 한번쯤 들렀던 것도 같은 가게. 이웃들이나 알까 언제부터 있었던 가게인지 언제 문을 […]
차마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고 애닳게 기다리던 노래 있었지요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소식 하나 들려주길 고대하며 엽서 한장 써붙이던 시절도 있었지요 하지만 흘러나오는 노래란 바람빠진 풍선처럼 희망하지 않는 것들이었지요 희망 가요 희망이 가요 여기 희망이 가요 그렇게 흘러들 갔지요 떠난 자리에 희망이 또 갈까요 낮은 자리 또 채워질까요 원치 않는 노래만 줄을 잇는데 지우고 쓰고 […]
꼬깃꼬깃 접혀 있는 깨알 같은 사연들 효능보다는 구구절절 부작용에 대한 변명이 열배쯤 많은 설명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빛깔도 잃고 그저 굴러다닌다 구의 표면에 찍힌 점들처럼 모두로부터 멀어져가며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혼몽 속에서 필요한 것은 작은 알약 하나 부작용이 넘쳐나는 작은 알약 하나 꼬깃꼬깃 접혀 있는 붉은 칸 어딘가 증상과 부작용 사이 효능과 금기사항 사이 수많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