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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민주공화국

사무실 오는 길, 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길이라 그런지 아주 가끔 높으신 나으리가 지나가는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지 사무실 가는 큰 길에 안보이던 경찰들이 나와서 교통 통제를 하고 있었다.(그러고보니 어제도 비슷한 시간대에 예행 연습 같은 것이 있었던 듯 싶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인도 신호등이 네 번, 다섯 번은 바뀌었을 시간인데도 형광색 조끼를 입은 경찰은 기다리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어떤 놈(?)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지만 21세기에도 이따위로 시민들을 우습게 아는가 싶었다. 기다리다 열받은 나는 (나으리 길을 막는 인도 신호를) 포기하고 차량 진행방향 따라 걸어가다 같은 방향 신호 둘을 건너 엘리베이터 타고 육교를 건너가기로 했다. 조금 걷다보니 나으리 오가는 방향이랑 같은 길에 있는 인도 또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수신호로 보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네놈들이 나를 무시하니 나도 네놈들을 무시할 수 밖에 없다는 류의 소심한 다짐을 하며 나는 경찰새끼들(!)이 보든 말든 잠시도 멈추지 않고 두 개의 직진 방향 인도 적신호등을 아예 무시한 채 그대로 건너왔다. 사람이 우선인 것은 바로 이럴 때다! 내 걸음을 방해하는 차량은 단 한 대도 없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횡단보도를 지나가니 한 사람이 맞은 편에서 건너왔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서 있었다. 다 왔을 참에 여전히 서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옆에 서 있는 일행에게 “너무 당당하게 건너와서 파란불인줄 알았다”고 하는 말이 들렸다. 경찰들은 차량 통제에만 정신이 팔려 정신나간 한 인간이 그들과 상관없는 루트로 지나가는 것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곧장 건너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육교를 건너 사무실 쪽으로 왔다. 고작 세 사람 서 있는 그 엘리베이터에서조차 새치기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분이 내 앞에 서서 어떤 이득을 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차량들과 행인들, 수백명 수천명의 불편이 나으리에게 얼마나 대단한 안락함을 주었을지에 관해서도. 사무실 도착한지 십수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호각소리가 들린다. 세상엔 디테일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나는 디테일 때문에 살아가기 힘들다.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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