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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

지난 늦가을 베르가못 꽃씨를 구해 두 개의 종이컵에 심었었다. 철이 맞지 않은 것은 알았으나 집안이어서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베르가못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이다. 어릴 적에 어쩌다 마셔봤던 홍차 ― 한참 뒤에야 어느 세심한 손길을 통해 알게 된 그 이름 얼 그레이 때문인지 베르가못은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금세 자랄 줄 알았지만 정말 깨알 같은 새싹들은 몹시도 더뎠다. 한 달, 두 달이 가도 키가 자라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큰 화분에 옮겨 심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푸른 빛은 여전하였으나 자라지는 않았다. 50여 개의 씨앗에서 30개의 싹이 나왔지만 결국엔 한 포기도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버렸다. 지난 6월, 시들은 콩나물처럼 비칠대던 마지막 한 포기마저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허다한 일, 천만의 말과 글을 뱉어내었지만 그 무엇도 시가 되지 못했고 천억의 번민들만 끊임없이 울렁거렸다. 끝도 없이 신기루에 속았으면서도 여태 포기할 줄 모르는 어떤 한 포기, 그 어떤 싹도 보이지 않는 화분에 언제까지 물을 부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비슷한 하루 척박한 작은 우주를 헤매인다.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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