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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다녀오는 길

어제 하루 다시 겨울로 돌아간 것 같더니 오늘은 날이 풀리었다. 본래도 약한데다 한동안 피하기만 하다 뒤늦게 찾은 치과에서는 고칠 일도 많아 일주일에 한 두번 치료를 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소개받은 치과가 어린 시절의 학교 근처여서 걸어서 갈 때마다 감회가 있었다. 이제는 모두 다른 건물에 다른 간판이 들어섰지만 가는 길엔 ‘대원호텔’+이 있었고 전교 부회장을 하던 예쁘장한 여학생이 살던 곳, “극동예식장”도 있었다.

거기서 얼마 가지 않아 3학년 때 전학 와서 졸업한 초등학교도 있다. 그나마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이곳, 이 동네에서 보낸 셈이다. 오늘은 신경치료를 받은 날이다. 마취주사를 맞는 통증 같은 것은 그닥 문제가 없었는데 묘하게 숨쉬기 힘든 상태는 상당히  괴로워서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숨을 잘 못쉬는 상황을 특히나 못견뎌 하는 편인데, 예를 들자면 겨울철의 만원버스가 그렇다. 말이 좋을 뿐, 신경치료라는 것은 신경을 죽이고 이를 죽인 후  보철을 더하는 것일 뿐이었다. 금요일에 올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을 이런저런 이유로 다음 화요일로 미뤄 예약하고 나왔다. 돌아올 때는 늘 시간에 쫓겨 버스를 타고 오곤 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사무실까지 걸어서 왔다.

치과 거의 맞은편엔 지금은 모 대학교의 일부가 되어버린 옛 경남도청 건물이 있다. 부산 와서 아버지께서 근무했던 곳이다. 도청은 결국 창원으로 이전하였고, 그곳과 주변 건물들은 한동안 법원과 검찰청사로 사용되다 결국 대학교 일부 캠퍼스가 들어서서 지금까지다. 치과 가던 시간에는 학생들이 꽤 많이 보여서 이곳이 작은 규모라도 대학가 분위기가 없지 않았지만 내가 그 곳에 속해 있는 동안 몹시도 치를 떨었던 사람인지라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도 프레쉬한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지금은 대학교 건물로 바뀐 도청 본관건물을 지나 초등학교 앞 큰 길가의 제과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어릴 적엔 그렇게 고급스럽게 보였던 티파니 제과점이 이제는 허름하고 오래된 다른 이름의 ‘빵집’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정문 건너편은 대학교 부속건물로 바뀌었지만 학교를 조금 지나가니 낡고 허름한 문방구가 눈에 들어왔다. 문방구 앞에는 주인인 듯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문방구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계실 리는 없을텐데 말이다. 서너 개의 문방구가 드문드문 열린 채 아침마다 북적대던 거리가 이제는 참 한산하였다.

학교 뒷쪽의 길에는 과외수업 하던(극동예식장에 살던 그녀, “엘리제를 위하여“의 쓰린 추억도 거기서 있었다) 판자집 같은 2층이 있었다. 나는 <1984년>을 읽으며 채링턴 문방구의 2층을 상상할 때마다 늘 이곳을 떠올리곤 했다. 이제는 더이상 판자집이 아니지만 그 작은 건물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쪽으로 해서 곧장 사무실로 오지 않고 부산 와서 처음 살던 집 근처라도 가고 싶어졌다. 초등학교 정문 앞은 고요하였고, 운동장 저편에서 체육수업 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처음 전학 와서 친구 없던 시절, 울타리에 갖혀 있는 칠면조며 다람쥐며 동물들을 바라보던 기억도 있다. 6학년 때는 시골서 전학 온 키큰 아이 넷에 뽑혀 온실과 화단 관리를 해야 했다. 담임이 우리를 대하던 태도 때문이었는지 나는 6학년 내내 우리가 머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학교 다니는 동안 단 한번, 아버지 일하는 사무실을 구경 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초여름이었던 것 같고, 뭣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학교 마치고 도청으로 오라고 하여 사무실로 찾아갔었다. 여직원이 환타를 따라줘서 나는 몹시 맛있게 먹었는데 그러다 음료를 흘려서 하얀 반소매 셔츠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인 생각도 난다. 도청 뒷쪽으로는 언젠가부터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바뀐 옛도지사 관사가 있었고 그쪽 길에서 벨 누르는 장난을 미친 듯이 하던 시절도 있었다. 아마도 불장난에 도취된 방화범의 심정과 비슷한 사춘기 소년의 느낌이었다.

내 샤프를 도둑맞고 친구 하나와 함께 점심시간마다 다른 아이들 윗주머니에 꽂힌 샤프를 훔치던 한때도 있었다. 구내식당의 라면집이 너무 붐볐는데 어쩌다 알게 된 문방구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거기서 라면 끓여서 먹기도 했던 기억도 있다. 그 어둑한 문방구 한켠에 있던 성인잡지도 생각난다.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무리하게 냄비를 교실까지 들고와서 불어터진 라면을 먹던 날도 있었다.

학교를 지나오니 우리 가족이 처음 모여서 살던 동네가 나왔다. 낮은 언덕배기 골목의 입구엔 이름도 참 낯설게 느껴졌던 “갱생이용원’이 있었고 조금 옆에는 자그마한 슈퍼도 있었다. 그곳을 떠올리면 나는 밀양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부라보 아이스크림'(콘은 아니었다)과 슈퍼 주인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처음엔 그 언덕쪽 골목을 찾기가 어려워 한두번 돌아보고 나서야 그곳이려니 했다. 이 거리와 집들과 오래된 골목들은… 말하자면 나의 “Strawberry Fields”이고 “Penny Lane”이었다. 부산 이사와서 처음 집앞에 나와 근처의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던 어색했던 날이 아직 기억난다. 슬프게도 그 어색함은 방학때 고향으로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 지금까지도.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이 모든 기억 속의 풍경들은 페니 레인보다는 스트로베리 필즈에 더 가까웠다.

부산에서의 초등학교 시절은 몹시 외로웠고 그 외로움은 중학교에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전학 온 부산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망향의 설움을 안고 사는 노인의 느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재일교포들의 방문이 러시를 이루면서 <옛동산에 올라>란 가곡이 자주 나오곤 했는데 나는 그게 내 느낌 같았다.

 

산천 의구란 말 옛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특히나 이 대목을 겨울 열서넛의 나는 타향의 노인과 비슷한 심정으로 공감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내 설운 마음 같았던 노래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고향 생각>이라는 처량한 가곡이었고, 늘 내 마음 같다고 생각했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일 저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자나깨나 너의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 하던, 은희가 노래한 같은 제목의 “고향 생각(Flee as a Bird)”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그 평범한 농촌을 무슨 성지인양 생각하다보니 훗날 고향 쪽을 둘러본 내 친구는 그 평범함에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고향은 내 마음에만 사무쳐 있었다. 이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삼촌 돌아가신 이후는 유산 다툼에(우리 가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툼이었다) 실망하여 외사촌 동생들과 소원해진 이후로는 고향을 거의 가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정서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수몰지구의 실향민 같은 느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묻혀버린 나의 살던 고향은, 경남 밀양 수산이다. 옛날 국사 시간에 배운 저수지 ‘수산제’가 있었다던 그곳이다. 이제 와서 보면, 강변을 끼고 있고 오래된 길다란 다리 하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시골 동네일 뿐이다.

봄날의 햇살은 점점 따사로와졌다. 거기서 사무실 쪽으로 조금씩 걸어가다 보니 잠깐은 여기가 어딘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대흥약국”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언덕배기 2층의 전세집에서 다시 이사온 골목 끝집에서 학교올 때 늘 보던 약국이었다. 정말 그때의 가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 같았다. 생각해보니 근처에서 예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쇠락했지만 아직도 열려 있는 “서대신동 골목시장”을 제외하고는 “오세민 안과”와 “정내과”니까 약국 아니면 병원인가 싶었다. 대흥약국 근처는 예전에는 하천이 흘렀다. 아마도 구덕산에서부터 흘러온 물이 이것저것 섞여가며 흘러서 자갈치까지로 가지 않았나 싶은데 골목시장 근처의 골목 끝집에 사는 4~5년간 나는 늘 그 길을 오가며 지냈다.

몹시도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시간이 맞을 적에는 아버지, 동생과 함께 그 길을 함께 걷곤 했다. 숱한 시간의 흐름 끝에 동생은 우리 곁을 떠났고, 아버지는 흐릿한 정신과 느린 걸음으로 하루를 이어가고 계신다. 어느 크리스마스엔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탄선물로 공책과 연필을 선물받은 것도 생각난다. 이미 산타클로스에 대해선 믿지 않을 나이에 이르렀건만 밤새 내 머리맡에 나타난 선물을 보고선 그 희미했던 불신이 크게 흔들려 학교 가는 내내 동생과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했던 기억도 난다.

마취주사를 맞은 입 안은 여전히 얼얼했고, 살짝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버스를 타기에도 정말 어중간한 거리가 되어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 그래서 두번째로 이사왔던 집도 보고 싶어졌다. 골목 어귀의 닭집은 추어탕집으로 바뀐 것 같았고, 골목의 일부는 시장 거리과 그대로 트여서 예전 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골목 끝에 정면으로 보이는 대문은 비록 모양은 달라졌어도 그대로였다.

문화아파트는 내 초등학교 때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인근 학생들에겐 일종의 중심가이자 번화가였다. 그곳 1층과 지하는 학생백화점과 식당, 그리고 나중엔 오락실도 있었다. 가장 붐비는 곳은 언제나 우표/동전수집 코너였고, 나는 거기서 몇번은 우표를 샀던 것 같다. 한때 구덕야구장은 야구의 성지여서 문화아파트 1층엔 스포츠용품 매장과 트로피, 상패 가게, 유니폼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문화아파트 옆 맘모스제과의 유리창이 어느 선수의 장타에 깨진 일도 생각난다. 이제는 야구장 자체가 사라져버렸고, 옛 영광의 트로피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빛날 때나 쇠락했을 때나 나의 것은 아닌 영광이었다.

야구장의 흔적이 겨우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옛 야구장 자리 옆 도로의 화단 위에 세워져 있는, 최동원과 심재원이 공을 주고받는  조형물이 있을 뿐이다.  최동원보다 더 훌륭한 투수들은 이후에 나왔지만 최동원 같은 선수는 없었다.  육교 앞까지 오니 기운이 빠져서 앞서가는 아주머니의 걸음을 겨우 따라잡아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육교에서는 잰걸음을 하기가 싫어져서 나는 천천히 걸어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길 기다려야 했다.

Nothing is real and nothing to get hung about. 그러니 그저 희미한 기억 속의 스트로베리 필즈일 뿐, ‘포에버’ 같은 것은 없다. 오전의 한때, 나는 40여분 동안 40여년의 시간을 걸어 사무실에 왔다. 여전히 오른쪽 입술은 감각이 다 돌아오지 않은 채 얼얼하다. 다른 곳에도 그런 치료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2023. 3. 14.

 

 

+예전 <이작자 여인숙> 시절 페이지 소개에 ‘대원호텔’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대원호텔”은 세월이 흘러 “대원장 여관”이 되었고, “글공장”은 “이작자 여인숙”이 되었다고. 이제는 그 여관조차도 허물어지고 한동짜리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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