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 다정했던 사람 누구 떠올라?
하지만 그 시절 음악은 모두가 기억하지.
/콜름 도허티, <이니셰린의 밴시>
대척점에 서게 된 두 배우의 연기는 인상적이었고, 촌뜨기 파우릭 설리반을 연기한 콜린 파렐의 망가진 모습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에 콜름 도허티(브렌던 글리슨)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인 것은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스러웠지만 영화는 끝까지 편치 않았다. 마음이 아프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쓰라린 느낌이거나 그런 게 아니라 불편함을 피할 길이 없었다. 블랙 코메디라고 하기에 그들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상황은 과하게 심각한 ‘피투성이’였다.
두 명의 배우가 그대로 함께 나온 감독의 이전 영화에도 비슷한 느낌이 조금 있었다. 실존주의니 부조리 문학이니 거창하게들 이야기하는데 감독의 의도 또한 그랬을 수 있겠지만 나는 영화 그대로를 봤을 뿐이고, 부조리를 부조리로 되갚는(?) 장면들이 불편했을 뿐이다. (‘밴시’라는 단어 자체가 나는 조금 불편하다.) 오래전에 내가 썼던 허접한 시의 소절들로 비유한다면, 실존의 ‘피투성'(Geworfenheit 被投性)이 ‘피투성이’가 되는 기막힌 순간이었다. 어쩌면 부조리함 자체가 이 모든 비극을 예고하는 ‘밴시’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함께 최근에 가장 주목받는 두 편이지만 생각할 많은 것들을 가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로선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파우릭의 사실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여기 그 무슨 ‘블랙 코메디’가 있는가) 그것의 단초가 된 콜름 도허티의 변심은 여러모로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인간은 부조리하게, 또는 부조리함 속에 던져진 존재이니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ㅡ ‘기투(企投 Entwurf)’라는 그럴 듯한 단어가 있고 젊은 시절의 한때는 꽤 멋지게 들리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가는 그게 실속없이 미심쩍은 허사((虛辭)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하루살이처럼 하찮은 평생이지만 “내가 시를 쓴다는 꿈”을 꾸어온 사람으로서 불후의 명작은 노망에 가까운 터무니없는 욕심일 뿐, 불후의 명작도 아니고 (세상이 몰라주는) ‘불우의 명작’도 아니고 그저 내 마음에라도 남을 뭔가를 향해 대책없이 꿈틀대는 오늘처럼 비루한 영원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고 싶은 것은, 존재는 누군가가 불러주는 이름에 의해 의미를 가지거나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게 쓰라릴 수도 있고, 대체 못할 ‘압점’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이라 한들……
/2023.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