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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종이 상자

아마 지금처럼 늦은 가을이었지 싶다. 20년쯤 전, 어느 날의 우울을 나는 기억한다. 심하게 가라앉았던 그날의 심정이 어째서인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생각도 나질 않는다. 어쩌면 ‘오늘 같은 날’이었을 것이고, 다르지 않은 매일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던 이상의 말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절망 말이다.

마음 챙기는데 언제나 열심이었던 그녀는 내 가라앉은 심사를 위로하고자 작은 선물을 보낸다고 했는데 그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었다. 하루 이틀 지나서였던가 곧 도착한다고 전화로 연락이 왔다. 택배는 아니었고 아마도 하겐다즈 배송 차량이었던 것 같다. 기사는 큰길 앞에 차를 대었고 내려갔더니 배송이 늦어 미안하다며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게 하루쯤 늦게 도착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그게 늦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사는 미안하다면서 작은 종이 상자를 내게 주었다. 하겐다즈 상표와 광고가 찍힌, 초록색은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빨간 종이상자였다. 눈 모양의 표식과 하겐다즈 상표, 그리고  “Wish you a warm day!”란 문구 아래에 “Häagen-Dazs Magic Blanket”이라 적혀 있었다. 기사의 친절까지 더해져 당시에도 나는 고맙고 따스한 마음으로 상자를 받았다.

시간은 그날 받은 아이스크림보다도 더 빨리 녹아 흘어진 것 같은데 종이상자는 여전히 그나처럼 그대로 있고 무릎담요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굳이 뜯지 않아도 충분하였고,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내게는 그것이 온기를 간직하는 방법 같았다.

그리고 때로 물건이 더 오래간다던 보르헤스의 이야기가 언제나 진실인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이 늦어버렸지만 그날의 아이스크림처럼 나는 그게 늦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모두 다 풀어헤쳐버려서 희망이라는 허사조차도 보이지 않는 낡고 오래된 상자 ㅡ 텅 빈 마음의 집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A insensatez que “eu” fiz!!

 

 

/2022. 11. 21.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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