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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염려할 수 있는 하루

아버지가 2주 동안 혈압약을 드시지 않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병원 진료결과를 보고 왔던 저녁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소리도 좀 질렀나 보다.

6학년때 아버지께 알파벳과 기초영어를 배웠다. 어느날 펜맨쉽을 사오신 아버지는 그걸 하루만에 다 쓰라고 하셨다. 내게 그건 너무 많은 양이었고 나는 그것을 결코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몰래 몇장을 찢어내고 나머지를 채웠다. 저녁 퇴근해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펜맨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내가 아직 잘모르는 영어 문장으로 나를 타박하셨다. 나는 나중에 혼자 좀 울었던 것 같다.

한달쯤 전, 아버지는 누나네가 있는 서울 다녀오셨다. 걸음이 많이 불편하고 정신이 조금 흐리긴 해도 휠체어까지 사용해서 기차에 태워드리면 서울에서 누나네가 기차까지 들어와서 모셔가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기차에서 나올 시간이 되자 아버지는 뭔가 불안했던지 살짝 눈물까지 비쳤다.

서울에선 병원에 들러 MRI도 찍고 몇가지 검사를 했다. 그런데 혈액암과 관련된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아서 부산서 다시 병원가서 검사를 했다. 혈액검사도 하고 엑스레이, CT촬영도 했다. 아버지 데리고 검사받고 돌아오는 과정은 나름 복잡했다. 하지만 걱정이 더 컸다.

은퇴후 한동안은 괜찮으셨지만 이후론 집안사에서 이런저런 문제도 많이 일으키셨다. 그리고 지금은 정신도 좀 흐려진 아버지, 지난 추석때는 TV에서 인터넷을 통해 뭐가 딱 나와야 하는데 전에 잘 되던 것이 아무리해도 안된다며 고민을 하셨다. 리모컨과 마우스,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병원의 모니터를 뒤섞으놓은 듯한 뭔가를 현실이라 우기며 명절날 온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흔들리는 정신세계를 명확히 보여주고야 말았다.

지난 목요일 검사결과를 보러 갈 적에는 아버지는 데려가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염려도 되었던 까닭이다. 나는 그 전날 밤을 뒤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이른 이별을 겪었지만 89세의 미운 아버지와 아직은 전혀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도 새삼 알게 되었다.

긴장된 아침, 한참을 기다려 들어간 진료실. 전국에서 설명을 가장 잘 해준다는 의사선생님은 꽤 상세하게 말씀을 들려줬고 그분의 결론은 노인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넘어지는 것이라고 하여서 한방에 우리들의 걱정을 잠재워주었다. 다들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돌아온 나는 아버지를 더욱 잘 챙겨드렸고 현재의 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당부를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잘 하실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아버지는 또 텔레비전에 자신의 약 성분에 관한 설명이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는다며 그걸 해결해야 한다며 혈압약 드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가족들이 아버지 검사결과를 그토록 염려하며 마음 졸이고 있는 동안 그는 엉뚱한 상상 속에 혈압약을 그렇게 빼먹고 있었던 것이다. 을러고 달래고 해서 겨우 약은 다시 드시도록 했다. 좋아하는 요구르트/시리얼 디저트도 만들어드리고 카푸치노도 차려드렸다. 앞으론 이발도 내가 해드릴까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것에 대해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이시다.

그럼에도 그의 정신 속에서는 여전히 텔레비전 속에 나오지 않는 본인 혈압약 성분 분석이 염려스럽다. 그걸 깡그리 없애줄 수 없는 나도 염려스럽지만 이런저런 염려 속에서 하루가 가고 또 온다. 다행히 염려할 수 있는 하루가.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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