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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케세나멘의 꽃

ㅡ 詩 쁘띠 플로르+에 부쳐

 

황금과 보물들 사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세 개의 꽃다발 사진을 보았다. 아주 오래전, 하워드 카터의 인상적인 언급을 읽은 이래 늘 마음 속에 남아있었던 바로 그 꽃들일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은 다발이 꽤 풍성한데다 묶은 모양이나 재료 또한 뭔지 모르게 전문적인 솜씨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일 것은 없었는데 나머지 하나는 좀 달랐다. 꽃다발의 모양새며 매듭을 보며 무엇인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자료에서는 이집트에서 수레국화가 겨울에 핀다고 했고 또 다른 글에서는 꽃들의 종류로 볼 때 그가 사망한 계절이 여름이라는 언급도 보았다. 세 개의 꽃다발엔 여러 종류의 꽃이 있었고, 마음 가던 꽃다발의 꽃이 수레국화는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들 꽃다발 가운데 하나가 소년왕의 두 살 많은 비(妃) 안케세나멘이 남긴 것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괜찮다. 목과 가슴을 장식한 꽃이나 두 꽃다발의 매듭에서는(미학적인 호불호를 떠나)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진다.(발굴 당시 사진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들 사진 가운데 두번째 꽃다발은 그것이 발굴 때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투탕카멘의 입상 곁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세번째 꽃다발은 앞의 둘과는 분명히 달랐고 그 어떤 특별한 것도 없이 오히려 갸냘프고 초라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안케세나멘이 마지막으로 바친 이별의 꽃이라 상상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투탕카멘 의자의 등받이 부조. 안케세나멘이 파라오의 몸에 향유를 발라주고 있다.

 

투탕카멘의 유물들을 모두 다 살펴본 카터의 소감이 그러했듯, 나도 그리고 상상할 뿐이다. 파라오의 ‘카(ka)’가 무탈하게 천국을 향한들 창졸간에 돌이킬 수 없이 떠나버린 그녀의 절대적이고도 하나뿐인 ‘메루트‘ ㅡ 거기서 나는 안케세나멘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의 위세에 둘러싸인 그녀의 운명을 보았다 생각한다.  3,300년 전의 꽃다발에서.

 

 

+안케세나멘은 투탕카멘 사후 재상 또는 신관으로 알려져 있고 그녀의 외할아버지일  가능성도 있는 아이와 결혼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고심끝에 그녀는 히타이트 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의 아들을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왕자는 이집트로 오는 도중에 사망하였고/살해당했고 아이는 안케세나멘과의 결혼을 통해 파라오가 되었다. 아이는 4년 가량 이집트를 통치했으나 결국 군사령관이었던 호렘헤브가 파라오의 지위에 올랐다.(쿠데타였다는 설이 우세하다.) 아이와의 결혼을 끝으로 안케세나멘에 대한 기록은 더이상 보이지 않으며 호렘헤브는 아케나텐, 스멘크카레, 투탕카멘, 아이에 이르는 파라오의 기념물과 이름들을 역사에서 지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 4대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훼손되었음에도 안케세나멘이 히타이트로 보낸 서신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편지가 그녀에 대한 약점 잡기 또는 축출을 위한 함정일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일각의 투탕카멘 살해설 가운데는 그녀가 독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영화 <미이라>에 등장한 이름 아낙수나문 또한 안케세나멘의 다른 표기다.(조세르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재상이며, 훗날 신으로까지 모셔졌던 이모텝이 악당의 이름으로 나오는 것도 비슷한 사레다.)

 

+petite fleur를 링크했다. 또 다른 18왕조 이집트와 대성당을 소재로 한 짧은 시는 개인적인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2021. 12. 21.
메루트의 상형에 살을 붙인 시는 여기서 읽을 수 있다.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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