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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버린 그것에 관한 약간의 자책 +

말할 수 없는 그것이란 제목으로 처음 쓴 것을 찾아보니 2010년의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애초의 그것은 ‘시’였다.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그것이었고, 말하기 힘든 그것이었고, 형언하지 못해 형언하지 못할 괴로움을 내게 주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게 처음은 아니었고 나는 여태 시에 관한 시를 꽤 여러 편 썼다.  한참 예전에 장난처럼 쓴 누구…시온지…가 그랬고,  절망과 헛된 희망이 교차하는 내가 쓴 가장 좋은 시, 쓰라린 포기각서 같았던 이하의 마지막 말이나 라면은 보글보글도 어쩌면 그렇다. 제대로 쓰진 못했지만 미련스런 할 수 없는 노릇도 그랬다. 이하의 마지막 말을 썼을 때 나는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 심히 서글픈 심정이었지만 그 굴욕의 시간을 오늘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꿈 또한 이하의 마지막 말의 깨어나지 못한 꿈 같은 서글픈 변종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 말할 수 없는 그것이란 제목으로 또 다른 시를 썼다. 처음엔 ‘더 말할 수 없는 그것’, ‘영영 말할 수 없는 그것’ 등으로 붙였지만 결국엔 ‘말할 수 없는 그것’으로 환원되었다.

이 시는 앞선 것들과는 달리 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꼭 그만큼이나 ‘말할 수 없는 무엇’이어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초라하고 서글픈 마음이었음에도 나는 시를 쓰고서 좀 기뻤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조금 자랑스러웠다.(그 느낌으로 “보내지 않은 메시지”를 썼고, 거기서 간지러운 몇줄을 빼서 실행한 것이 보낸 메시지다) 사실을 들여다보면 심히 아픈 이야기지만 내 마음에 관하여 가능한 만큼 제대로 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것은 의미를 알려줄 수 없는 “메르우트”라는 단어에서 시작되었다. 히에로글리프로 쓴 한줄은 ‘메르우트, 엔 메르우트’라고 읽을 수 있다. 다만 발음은 조금 미묘한 차이를 두고 슬쩍 다르게 표기했는데, 의미를 찾기 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뜻을 알고자 애를 쓴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몇 글자가 심오한 의미를 지닌 문자이거나 비밀은 아니다. 평범하고도 위대한 무엇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그 시는 히에로글리프 한줄이거나 끝의 네줄이 전부다.

4행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첫번째 줄은 잇사의 인용으로 시제만 과거형으로 바꾼 것이고 둘째줄은 나의 시점, 셋째줄은 잇사의 시점이기도 하지만 형식상 그것을 빌렸을 뿐, 내 시각이라 할 수 있으며 (“눈에” 다음에서 좀 뻔하고 감상적인 글자 세자는 생략했다) 마지막 줄은 100퍼센트 내가 보는 것이다.

 

찢어진 문틈으로 보던 은하수+
암흑과 광년의 세상을 가로질러
남루한 그 옛날의 눈에 맺힌
당신이라는 이름의 눈부신 오늘이어요

 

하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이 시를 배신했다. ‘말할 수 없는 그것’에 관해 하루아침에 깡그리 다 설명해버리고 말았다. “○○는 하되 XX는 하지 않는다”던 방중술의 오래되고 미심쩍은 어떤 금언을 지키지 못한 느낌 같은 것,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허탈하고 참담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평소의 조심스러움, 소심함이나 신중함과 달리 나는 대책없이 직선적인 사람이고 그런 쪽으로 마음을 감추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느꼈기에 가만 있기가 더 힘들었다. 사실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비할 수 없이 온당치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약간의 소소한 이야기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은 하루만에 ‘말해버린 그것’이 되었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이라 했지만 내 마음보다 슬프지는 않다.

 

 

+잇사.

 

 

+뭔가 빠진 시가 하나 있었는데 왜 그걸 빼먹었던지 모르겠다. 내가 시를 쓴다던 꿈, 이제사 생각이 나서 한줄 집어넣었다. 매일같이 그 캄캄한 화면에서 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2019. 11. 29.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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