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개의 다른 시간대에서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어져 있다는 것, 알 수도 있겠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진정한 시인의 감수성, 시인의 마음에 관해서는 무디고 모자란 사람이라 잘 모르지만요.
/2019. 8. 24.
어제 저녁
퇴근하려는 참에 전화가 왔습니다. 모친이 삼치 요리를 하는데 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모퉁이 부식가게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겨울에 어묵도 잠깐씩만 팔고 여름의 삶은 옥수수도 얼마 가지 않아 뭔가 팔아드리고 싶어도 그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인사를 하고 물었더니 대파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큼지막한 냉장고 문을 열더니 냉동실에서 씻어서 썰어둔 대파를 꺼내 반쯤 넣어 주셨습니다. 예상이 되겠지만 한사코 계산을 거절하셔서 결국 파만 받아 왔습니다. 모친께서 다음에 한번 거기서 장을 보기로 하였습니다./2019. 8. 24.
2017년 늦은 가을
미스터 에이라는 시인이 계십니다. 2017년 어느 늦은 가을날 서울에서 경북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던 분의 이니셜입니다. 옆자리에는 여고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어쩌면 사소한, 아니면 치졸하고 찌질한, 또 어쩌면 부끄럽고도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일은 간단히 풀리질 않아 결국은 경찰서 조사를 거쳐 검찰에까지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중견시인이자 오십대 후반의 지방대 교수라는 에이씨가 누구인지 정확히 추려낼 자신은 없습니다. 심증은 확증처럼 갖고 있지만 그것 뿐입니다. 한때 정치적 이유로 절필을 선언했던 분이었는데 좋은 세상 만나서 다시 활발히 활동을 하시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의심하는 에이씨는 그 사건 즈음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다며 자신의 소통의 장이었던 트위터를 뜬금없이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누군지 모를 에이씨는 2018년 마침내 전주지검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내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 당사자께는 다행스런 일인지 올해 들어 학교까지 옮겨서 이제는 유명 시인, 지방대 교수, 오십대 후반의 연결고리도 끊어져버렸네요. 이제는 수도권 교수님(d대)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선지 내가 의심의 눈을 지켜봤던 그 분은 트위터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최근엔 어떤 특정정당 지지자들을 ‘매미들’이라고 하더군요. ‘승냥이떼’라는 표현도 썼고요. 그분 역시 이니셜 에이씨니까 에이씨라고 할게요.
에이씨의 말씀을 들으니 잘나가는 어느 냉소적인 교수님이 걸핏하면 아무데나 벌레 충자를 붙여가며 사람들을 무시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심지어 덜떨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모두 사람이지요. 나는 그다지 시인의 마음도 정서도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을 달리 불러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심 가득한 분께서 매미, 승냥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는데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분의 시에 관해 딱히 관심이 없는 편이라 이야기 할 것도 없는데 엉뚱한 일로 해서 자꾸 그분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그래서 2017년 늦은 가을 서울에서 경북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던 50대 후반 지방대 교수이자 유명 시인이라는 에이씨의 우습고도 치사한 행적이 생각나서 그분의 허벅지를 시원찮은 연필로 콕 찔러 보았습니다. 저도 물론 혐의가 없다는 것은 의심치 않습니다만./2019. 8. 24.
내게도 그런 하루 : 벌레의 기억
십수년 전 어느 가을 날이었습니다. 창가 시들한 허브 화분에 이름모를 벌레 한마리 천천히 날아 들었습니다. 가지가 아닌 화분 옆면에 매달린 듯 자리를 잡더니 그대로 멈추었지요. 아주 작은 벌레는 아니었고 휴식이라도 취하는가 싶었는데 다음 날에 봤을 때도 꿈쩍 않는 것이 곤충은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특이한 모습에 나는 사진을 찍었고 묘한 모양새가 ‘좌탈’을 생각나게 해서 중의적인 의미로 “어딘지 불법적인“이라는 제목을 붙였었습니다.(이제 찾아보니 2004년 10월이었습니다.)
어제는 종량제 쓰레기 봉투를 버리는 날이었습니다. 나름 절약하느라 비닐봉투를 눌러 담을 수 있는 쓰레기통을 사용하고 있는데 쓰레기통 두껑으로 누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두껑을 들고 입구까지 가득한 쓰레기를 누르려는 참에 보니 입구 안쪽에 손가락 한마디 만한 가느다란 벌레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죽은 벌레인가 싶어 슬쩍 건드렸더니 느리지만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쓰레기 봉투를 꺼내려면 먼저 쓰레기를 꽉꽉 눌러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벌레를 짓이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쓰레기 버리는 것을 다음 주로 미루고 그냥 두고 왔습니다.
오늘 사무실 나와서 보니 화장실 벽에 어제의 그 벌레가 붙어 있었습니다. 오래 전 화분에 날아와 앉았던 잿빛 곤충처럼 그냥 꼼짝않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건드리면 움직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죽었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합당한 것은 없고 그 무엇이 불법적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퀘퀘한 그 세상에 매달려 있는 것이, 또는 편히 쉴 자리를 찾는 것이 그들 벌레의 일만은 아니겠지요. 그것이 어제 쓰레기를 버리지 못한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어떤 한 세월이 내게는 그런 하루였습니다./2018. 10. 19.
출근길의 후기
오늘 사무실 나오면서 부식가게를 지나왔습니다. 워낙이 손님이 없다보니 지나가는 행인의 발걸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분입니다. 후텁지근하고 컴컴한 안쪽에서 또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이 마주쳤고 저는 다시 한번 어제 저녁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분도 어쩌면 매미일지 승냥이일지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붕어, 가재, 개구리로 살라는 분도 있으니 그분들이 정녕 그리 말씀하신다면 아주머니는 어쩔지 몰라도 나는 매미도 되고 승냥이도 되겠습니다. 기꺼이 벌레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3초 기억력의 전설을 지닌 붕어만큼은 사양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에이씨 같은 분도 잊지 않고 지금처럼 기억할 수 있겠지요./2019. 8. 24.
이들 일련의 에피소드와 관련이 별로 없지만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2013년의 글,
억하심정
은 없다.
그저 조금 더 말하고 덜 말할 뿐,
좋은 것 좋다고도 별로 말하지 않고
싫은 것 싫다고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분 행동…… 거지가 어떻다 한들
그분 연필…… 부러뜨리거나 말거나
알아서들 떠들 일, 관심도 없다.
그게 그거니 시 이외의 생각으로 보는 것도 없다.
정말 아무 생각 없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 없었던 이
연탄재 두어장 내 앞에 있다면
그 뜨겁고도 텅 빈 골대를 향해
있는 힘껏 슛팅을 하고 싶다.
(서술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예술~)/2013. 7. 26.
짬짬이 정치판도 기웃거렸던 에이씨,
최근에는 어떤 분을 옹호하기 위해 용감무쌍 뛰어들어 도우미 역할도 하셨다.
‘허벅지’의 진실이 그분의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느낌은 있다.
연식이 좀 된 연탄이지만 활활 타오를 수 있다던 그분 생각하면 가끔 실소가 난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다던 시심을 가지신 바로 그분.
누군지 모르지만 너에게 묻는다던 그분을 향해
그대로 낭송해드리고 싶다.
ㅡ 너에게 묻는다,
이 제목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