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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는 이어폰

소니 mdr-e888이 내가 아는 최고의 이어폰이었던 시절이 조금 지난 뒤 나는 “내 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어폰이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무슨 근거 박약한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드웨어에 대한 소프트웨어의 우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것이 물론 ‘청력’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내 귀는 좋은 이어폰은 아닌 것 같다.

지난 밤 모처럼 헤드폰 이것저것 꺼내서 좀 들어봤다. 헤드폰을 수집한 것도 아닌데 내가 뭘 잘 버리지 않다 보니 오래된 것들도 몇 있었다. 젠하이저의 자그마한 헤드폰 2종, 그리고 블루투스 2종, 알레산드로 헤드폰 하나, 젠하이저 유선 헤드폰, 그리고 보스의 헤드폰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저것 들어봐도 압도적인 차이를 느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내 귀가 그런 쪽으로는 그리 예민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고, 또 음악이 어떤 것인지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곡인지가 비할 수 없이 의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의 15년쯤 전에 구입한 px200도 나름 괜찮았다는 점에서(패드가 다 해져서 그것만 교체품을 구해서 쓰고 있다) 스스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게 있어 극적인 차이란 것은 크고 작은, 미세하거나 분명히 드러나는 음질의 차이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내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어떤 것이냐에 관한 느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음악적인 취향도 그렇고 민감하지 못한 음감도 그렇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음악을 들어 왔지만 내 귀는 말하자면 형편없는 이어폰이라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젠하이저 헤드폰을 주로 구입했던 것도 mx400 이어폰의 무던함, 그리고 여러모로 ‘다크한 느낌’과 함께 이외에는 아는 메이커도 별로 없어서 그랬지 싶다.) 그리고 형편없는 이어폰을 장착한 그 머리 위로 형편있는 헤드폰을 얹는다고 해서 딱히 형편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모자란 내 귀에 맞는 음악, 조금 과분한 음악을 찾아 들었을 뿐. 그리고 여기 고백하자면 십수년 전의 가장 좋은 이어폰이나 오늘의 형편없는 이어폰이나 사실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 따위는 노이즈 캔슬링으로 차단되어버린 세계에서 나는, 흔해빠진…….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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