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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허함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퍼백에 넣어 온 <혼자 가는 먼 집>을
좌석 옆에 끼워뒀다 쉬엄쉬엄 다 읽었다
내게도 더이상 어울릴 수가 없을 법한 제목이었다
누군가 꿈꾸고 간 베개에 기댄 채+
불편한 자세에도 불편한 마음의 자세에도 더 어울릴 수는 없었다
보르헤스의 강의와 이창기는 미로처럼 찬밥처럼 화물칸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나는 기내 반입량을 초과하여 지퍼백에 1리터의 액체를 넣어온 것이었다
처음인양 보았고 처음처럼 마셨다
어떤 페이지는 집중해서
다른 사연은 설렁설렁 넘어갔다
엑스레이 투시기와 소지품 검사, 모든 감시망을 피해
투명한 지퍼백에 온갖 맛을 지닌 1리터의 액체를 몰래 넣어왔다
소울풀 모운풀 엉키고 풀리고 질척이는 것이
소줏잔이라도 깨물고 씹는 듯이
치떨며 부러워하며 찔끔찔끔 마셨다
약간의 허함 또한 그곳에 있었다
그렇다 허한 당신 허할 수
없었던 당신 먼 집의 전부일 것 같은
당신
그리하여 지난 밤에도 <혼자 가는 먼 집>에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 쭈그러진 지퍼백 속에
나눌 길 없는 허한 공기 속에
홀로 갇혀 있었다
썩어 없어질 몸은 남고
썩지 않는다는 마음이라는 썩어버린 악기++는

 

 

/2019. 4. 18.

 

 

+
씁쓸한 여관방,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후기, 허수경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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