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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의 소리들

소리에 관해서 제일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라면 어릴 적 할아버지의 외딴 방에 있던 크고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던 “눈물젖은 두만강”의 전주다. 금속성의 큼지막한 소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나에게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향수가 뭔줄도 모르고 ‘퍼퓸’인줄만 알았는데 말이다.

오늘 시간이 있어서 옛날에 쓰던 이어폰들을 좀 찾아봤다. 뒤져보니 나도 참 미친 짓 많이 했었나 보다. 숱한 엠디 플레이어와 이어폰들. 그것들을 뒤지게 된 것은 요즘의 커널형 이어폰이 너무 불편했고 그래선지 소리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이어폰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폰에 딸려온 (튠즈 바이) akg / b&o 제품들만 들어봤지만 나는 두 이어폰 모두 불편해서 잘 쓸 수가 없었다. 예전의 이어폰들도 솜을 끼우지 않고는 불편하다고 느꼈는데 아무튼 심히 편치 못했다.

그래서 옛날 이어폰들이랑 비교하면 소리가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제일 먼저 mdr-e888을 찾아봤다. 내 희미한 기억에 틀림없이 어디 하나 있긴 있을 듯 싶어 서랍 여기저기 찾아보니 뭔가 좀 끈적해진 선을 지닌 이어폰이 거기 있었다. 워크맨과 mdp의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이어폰이다.

내게는 본래 두 개의 888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3.5mm 구경의  lp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소니의 되먹지 못한 차별화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mp(미니 플러그) 방식의 것이었다. 하지만 두 제품 공히 즐겨 쓰지 않고 있다가 lp는 오래 전에 누군가에게 줬고 mp만 있었는데 다행이 mp를 sp로 바꿔주는 변환짹이 하나 있어 연결이 가능했다.

그래서 akg, b&o(하지만 그들이 만든 제품은 아니다)라는 이름들이 새겨진 두 이어폰과 비교해서 들어봤는데 착용감이나 소리나 내게는 888이 맞는 것 같았다. 리메이크 버전의 love is the drug을 틀었다가 감이 잘 오질 않아 데이빗 브로자의 하이 눈을 들었다. 내가 꽤 좋아하는 ‘타는 목마름’의 노래다. 그래서 (내 기억에 저음이 강력한 것으로 알려진) 독특한 모양새의 mdr-ed136과 mdr-ed238로도 테스트를 해봤는데 238이 꽤 편하게 들렸다.  이 두가지 이어폰은 이어폰의 한 부분이 돌출한 것이 아주 작은  커널(?) 같은 느낌이 있었다.

mp 플러그를 일반으로 변환하는게 mp1s인지 mp2s인지 가물가물한데 그건 하나 밖에 없고 사제품이라 조심스러웠다. 반대로 변환하는 짹은 세개나 있는데 말이다. 그런 문제들 해결하느라 부산의 덕성전자를 틈만 나면 오가고 서울 낙성대(지금도 영업을 하는지 좀 불분명하지만 ‘낙성대av’라고 한다)에 주문을 해서 택배를 받던 시절이었다. 내친김에 샤프 번들 이어폰과 (내가 제일 편하게 사용했던) 켄우드의 번들 이어폰(mx-400 또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oem 제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도 감상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888, 136, 238에서는 데이빗 브로자의 반대편에서 나오는 또다른 목소리, 내가 몹시 좋아하는 이의 음성이 꽤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노래를 아주 많이 듣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어딘지  특별한 영혼을 지닌 이라는 막연하면서도 꽤 분명한 확신이 드는 그런 사람이다. 하이 눈을 특히나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이어폰 챙기다 보니 어떤 것은 이어폰을 감쌌던 솜이 문드러져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것은 일부 사용하지 않고 넣어뒀던 이어폰 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중으로 지퍼백에 넣어뒀던 몇몇은 용케 괜찮아서 888에 끼울 수 있었다. 문드러진 이어폰 솜과 까마득히 잊고 지낸 오래된 기기들이 21세기의 도끼자루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에, 아마도 4월 이후 쯤엔 시간을 내어서 mdp와 몇몇 카세트도 한번 챙겨봐야겠다. 멋지게만 들렸던 켄우드의 베이스가 지금도 그렇게 들릴지 궁금하다. 당시 소니 워크맨의 최전성기 대표작이었던 fx5 카세트는 조카에게 줘서 없지만 카세트 플레이어도 몇몇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잠깐의 즐거움일 뿐이고 어리석고 모자란 이의 잔재 같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내 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어폰이라던 내 오래된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이제 확신할 수도 없지만 외할아버지의 라디오에서 나오던 소리, 전파상에 적혀 있던 ‘라듸오’ 수리라는 글자는 별다른 플레이어나 도구가 필요치 않고 내 마음에서 지워지는 법이 없다.

 

 

+확인해보니 미니플러그를 일반플러그로 변환하는 짹의 정확한 명칭은 pc-mp2s다. 지금도 일본서는 드물게 판매하는 것 같은데 2만원을 넘어가기도 하는 것 같다.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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