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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덟 살에게 ◎

1.
여름엔 삶은 옥수수도 가끔 사고 겨울엔 어묵을 사가곤 하는
길모퉁이 부식가게, 그녀가 등 돌린 채 앉아 있다.
바깥은 이토록 봄날인데 닫힌 창문 너머로 일없이 앉아 있는 그녀의
잔기침 소리가 들린다.
김장이든 부식이든 일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도 즐거이 움직일 분이건만
이렇게 환한 아침 어둑한 실내에서 고개 숙이고 있다.

 

2.
유치원 아이들이 손잡고 봄나들이를 간다.
세상에 유치원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길바닥에 붙어 있는 이름 적힌 은빛 스티커를 보다
내 일곱 여덟 살 시절을 잠깐 떠올렸다.
그때 울고 웃고 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생각하면 마음 쓰리지만
한편으론 그 덧없음이 얼마나 눈부시고 가슴 뭉클한 일이었는지
가능하다면 이 모두를 내 여덟 살에게 전하고 싶다.

 

3.
사무실 와서 도시락을 꺼낸다. 오늘은 회덮밥이다.
생선 종류를 들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따로 가져온 밥에 ‘칠분도쌀’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예전에 내가 떼낸 시래기밥, 견과류죽, 또 시래기밥 포스트잇이
냉장고 옆에 몇장 남아 있다.
이렇게 환한 봄날 아침 고개 숙인 채 앉은
수많은 잘못들의 총합인 내가
스물여덟 살에게, 모든 여덟 살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 가운데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를 작은 부분들이다.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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