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았으면 찾지 않았을 것이다. <녹터널 애니멀즈>의 불편함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 싱글 맨>을 통해 감독에 대한 느낌에 극적인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뜻밖이었다.
원작자와 감독이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퀴어 영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퀴어 영화겠지만 성적인 정체성보다는 상실과 복원이라는 관점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가 성적인 소수자를 다루고 있음에도 부담스런 느낌은 별로 없었고 오직 상실에만 공감하며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 ㅡ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실감이라는 점에서는 내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깨어난 아침, 침대 위의 만년필에서 잉크가 새어 하얀 시트가 검게 물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손이 그쪽으로 가지만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상태고 어떻게 할 기력도 없다. 잉크 묻은 손으로 하여 자기 입술에 잉크가 묻어도 알지 못한다…… 정말 그런 것이었다. 나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이 장면이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여기 링크했다가 삭제했다.)
그리고 싱글 맨이란 이름을 따라 몇몇 ‘맨’을 떠올렸다.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뜻하지 않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제일 먼저 <시리어스 맨>이 생각났고, 다시 날자꾸나 하던 <버드맨>과 거기 없었다던 엉뚱한 ‘그 남자’ 이발사도 어른거렸다. 현실이라면 ‘시리어스 맨’이겠지만 상실감에 관해서라면 나로선 ‘어 싱글 맨’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거나 꿈이거나 ‘그’이거나 ‘그녀’이거나 도무지 복원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귀퉁이, 또는 후미진 (영화관의) 자리에 본능적으로 눈이 가는 사람으로서 <a single man>이 a single man에게만 집중되어 있음은 조금 안타까웠다. 그것은 ‘다크 시티’의 마지막에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버린 형사(윌리엄 허트)나 ‘오픈 유어 아이즈’의 빌딩 옥상에서 자신이 정체성에 충격을 받는 정신과 의사에 대해 내가 가졌던 묘한 연민과 비슷한 무엇이다.
짧고 인위적인 조우였고, 16년을 함께 한 짐(매튜 구드)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헐리우드의 꿈을 안고 마드리드에서 왔다가 처량한 신세가 된 카를로스(존 코르타자레나)를 냉정히 보낼 때 그 청년 또한 a single man이었고(나는 느끼한 이 청년이 외면당한 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결국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 팔코너 교수의 생각도 못한 죽음을 목격하게 될 케니(니콜라스 홀트)에겐 이 무슨 캄캄한 절벽이었을까 싶다. 끝내 콜린 퍼스의 사랑을 얻지 못한 찰리(쥴리안 무어) 역시 a single (wo)man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內傷'(또는 外傷!)을 가진 주인공이었지만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단장을 했으나 “과거에 사는 것이 나의 미래야”라고 말하는 그녀를 비롯한 그의 가까운 모두가 더하고 덜할 수 없는 a single man으로 보였다. 혼자라는 것 자체가 확실한 內傷이니 거기 물론 나도 빠질 수 없겠고.
그래서 <녹터널 애니멀즈>의 경우와는 정반대, 특별히 대단한 영화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a single man의 심사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읽는 이가 봤으면 싶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아픔 ㅡ 어쩌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 거기 있을지도.
/2017. 11. 22.
+개인적인 취향 내지 결함이겠지만 유능한 디자이너이기도 한 감독과 스타일리쉬한 콜린 퍼스의 이미지로 하여 너무 깔끔한 것이 오히려 영화에의 몰입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