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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롱이 +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다. 길은 그다지 막히지도 않았고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나는 전부터 나름의 준비를 했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차 안에서 들을 음악에 관한 것이었다. 터널로 진입하기 전에 있는 번잡한 교차로에서 정지신호에 나는 조심스레 차를 멈추었다. 어쩌다 겪게 되는 잠깐의 정적 속에 귀에 익은 감상적인 플라멩코 스타일의 기타 인트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멋진 목소리로 포르투갈어 낭송이 시작되었다.  또낑요가 브라질의 시인이자 가수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를 만나 한껏 고양되어 있던 초기 시절의 작품이자 그들의 가장 멋진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 할 노래였다. 나는 그 내용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으로 충분했고 그녀가 내 곁에 앉아 한 공간을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핸들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맞추며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살짝 그녀에게서 손을 빼서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고 우리는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다 도착하였다. 그녀는 내가 손을 뺀 것을 조금 원망스러워 했다. 나로선 곡선의 도로를 한 손으로 불안하게 주행하기보다는 그녀와의 길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었고, 그 짧은 시간에 비할 수 없는 세월을 그녀와 나누는 것을 꿈꾸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지 못했던 그 짧은 시간… 정지 신호가 다시 주행 신호로 바뀌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룬 사람도 있다.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에서 홀라딕이 신께 간구하여 찰나를 연장하고 또 연장해가며 자신의 희곡을 집필하기 시작해서 완성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총탄이 격발되는 순간부터 그의 몸을 관통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말이다. 그 총탄은 우리들 모두가 예상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간을 뛰어넘어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였고, 다시 오랜 세월을 돌아 누군가의 가슴에 박힌 채 남아 있다.  홀라딕처럼 극적이고 충족된 결말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그런 순간이 있다면 바로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목소리가 느릿하니 흘러나오던 그때였을 것이다. 그것을 ‘소유’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고 그 어떤 영속성을 상상할 수 없음에도 나는 그렇다. 삶에는 너무 많은 위험이 있고 그 위험은 ‘그녀’라고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는 노래했는데 그 어떤 위태로움이 거기 있었는지 가끔 생각해본다. 이제 나는 거의 매일 그 교차로에 멈추곤 하지만 다른 쓰라림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위태로움 또한 내 곁에 없다.

 

 

/2017.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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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을 ‘길모롱이’라 붙인 이유는 그 도로가 휘어진 오르막길인 까닭도 있지만 어릴 때 <빨강머리 앤>에서 본 그 단어를 오래도록 좋아했기 때문이다. 앙숙이었던 길버트와 앤이 졸업하는 즈음엔가 둘이 가까워지면서 끝을 맺는 장면에 붙은 작은 제목이 바로 ‘길모롱이’였다. 어렸던 나는 그들의 뒷 이야기를 알지 못했지만 어떤 느낌은 있었다.(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으나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책이어선지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모롱이’의 사전적 의미는 ‘산모퉁이의 휘어둘린 곳’을 뜻하고 모퉁이보다 범위가 좁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길모롱이’란 단어는 내 마음과 달리 사전에 따로 없었다.

무치

데.호따.무치

2 thoughts to “길모롱이 +”

  1. 운전을 하기 시작하면서 7,8년이 지난 지금까지 늘 양손으로 핸들을 꼭 붙든 자세로 운전을 합니다.
    가끔 여유를 부리자면 문 손잡이에 팔꿈치를 얹는 정도.
    그러다 아주 가끔은 한손을 놓고 운전을 해봅니다.
    도시고속도로에서 높은 속도로 한 손으로 운전할때의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러면서 무리한 부탁이었음을… 아주 아주 가끔 생각합니다.
    섭섭해 했던 마음조차 미안합니다.

    1. 운전하고 거의 10여년은 의자를 바싹 붙인 채 긴장한 채로 다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많이 느긋해졌지만
      여전히 운전은 피치 못해 하는 일 같고 낯선 길에서는 더 많이 긴장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짧았던 잠깐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잡으려던 손도 빼려던 손도 결국은 같은 것이었겠지요.
      그 어느 쪽이든 아무 상관없이, 정말 그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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