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너닷새째 골골골이다. 콧물로 해서 코밑은 헐었고 기침은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는다. 잠을 잘못자서인지 다른 문제가 있는지 최근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턱이 아파서 입도 잘 못 벌리겠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루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vitor ramil 의 노래로 알게 되었던 께렌시아, 얼마 전 어느 정치인께서 고상하게도 께렌시아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관해 여지를 남겼다. 입에 담지도 못할 낯뜨거운 소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보니 일견 멋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그런 느낌은 들지가 않았다. 그녀라고 께렌시아에 대해 이야기 못할 일은 없지만 어느 줄에 설지 아니면 발을 뺄지를 가지고 갖다붙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정치인은 투우였을까.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투우사의 잘 벼려진 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까. 아니면 어쩌다 적이 되어버린 다른 소의 뿔에 그렇게 상처를 입었을까…… 단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지 어떨지에 관한 생각이었다면 세상이 께렌시아로 넘쳐나거나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씁쓸한 느낌이었다. 스페인어에서 께렌시아의 어원이라는 ‘querer’에 ‘to desire’란 의미가 있다는데 행여 그거라면 모를까. 그게 힐링의 좀 유식한 척 고상한 척 갖다붙인 이름쯤이라면 또 모를까. ‘께렌시아’는 마뚜 그로쑤에 있는 지명이며, 투우가 안정과 평안을 느끼는 투우장 속의 특정한 장소라는 의미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를 상징하기도 한다(헤밍웨이).
하밀의 께렌시아는 조앙 다 꾸냐 바르가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피할 곳 없는 매일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querência / vitor ram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