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흘러갔고 나는 아직 그 자리,
부족하고 텅 빈 그 자리를 물로 때웁니다.
/2009. 11. 14.
연로하신 모친이 여전히 살림을 하시니 그거라도 도와야겠다 싶어 잠깐씩 부엌을 들락거립니다.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제일 쉬운 것은 역시 설거지, 여기저기 오가며 가끔은 삼시세끼 설거지를 하기도 합니다. 그건 운명이 아니지만 운명이기도 합니다.
설거지 하면서 지난 날 돌아보면 수세미에 힘이 들어가 잘도 박박 문질러댑니다. 흥건한 기름때나 곤란하게 냄비에 눌어붙은 흔적이나 결국은 깨끗이 벗겨냅니다. 세상에 못난이는 모든 것이 운명입니다. 세상 그 누군들 못나게 태어나지야 않았겠지만 스스로 못나게 자랐고 설거지는 내 운명입니다. 무엇이든 제대로 요리하지 못하는 이의 운명입니다.
깔끔히 잘 정리하지는 못해도 그럴 때면 나는 오류투성이에 전기만 잘도 잡아먹는 식기세척기입니다. 하지만 지난날의 온갖 잔해와 오점들을 향해 쉼 없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여도 그다지 난감하지는 않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니까요.
하지만 요리하는 꿈을 아예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가끔씩은 물어도 보고 수첩도 하나 마련할 참입니다. 예쁘게 계란말이도 만들어보고 싶고, 라면만 보글보글 지겹게 끓이지 말고 된장찌개에 미역국도 해볼 겁니다. 카레도 만들고 나물 쯤은 무칠 수 있어야겠지요. 넘쳐나는 부족함에 열성인 꼭 그만큼 열성이 필요한 운명입니다.
씻지 못할 오점들을 향한 한때의 설거지는 끝이 났지만 또 다른 한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건 살아 있음의 운명입니다. 부끄러움은 그 운명 속에 숨죽이고 있을 뿐, 설거지가 내 운명이라고 해도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나는 흘러갔고 당신은 아직 그 자리에 있습니다.
/2017.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