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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의, 또는 물 속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시를 뒤적였기 때문이었다. amsterdam sur eau. 꿈꾸는 듯 찰랑대는 끌로드 치아리의 연주도 좋았지만 그 눈부심의 값은 오락가락 하는 듯, 영화속의 목소리가 나는 더 듣기 좋았다.

먹고 싶은//
퇴근 3분전이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서 시작하여 이런저런 여자들 하릴없이 늘어놓은 끝에 이창기는 <물 위의 암스테르담>을 그렇게 끝맺었는데 노골적인 것을 마다하지는 않지만 소심한 나였다면 아마 줄띄우기도 ‘여자들’과 ‘퇴근하는 이’ 사이에 했겠고 어휘 역시 “허기진”쯤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싶다. 본 적 없는 묘연한 물 속의 암스테르담이니까.

하지만 그 작은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그 결과물이 궁금하다면 이 궁상맞은 몰골을 보면 되겠고 <물 속의 암스테르담>이 나는 더 잘 들여다 보였다. 역시나 “네”가 아닌 “내 물비린내”로 줄을 바꾸어가며.

 

비록 우리
막 열이 내린 시간의 이마를 더듬듯
멀찍이 떨어져
한가롭게 저녁 강가를 산보하고 있지만
/물 속의 암스테르담, 이창기.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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