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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운명

피치 못할 운명이 만들어낸 어떤 방이 있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거나 잃어버렸을 크게 다르지 않은 방이다. 애초에 책장이가 없던 그곳에 어느 날 나는 책을 가져다 둘 마음을 내었다. 그리고 책장을 마련하면 무슨 책들을 꽂을지 생각을 좀 했다. 전공이라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을 정도, 나는 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철학적인 것을 싫어한다기보다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조금 냉소적이었던 것 같다. 추리소설과 과학소설, 환상소설을 좋아했었고 천문학, 물리학이 보다 철학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그때 구입했던 관련서적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분야는 펼쳐본지 오래다. 아무튼 이런저런 변화를 거치며 어딘가에 좋아하는 시집과 좋아하는 작가의 (거의 전집에 가까운)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책장 한단 정도의 크기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두 개의 칸으로 된 얇다란 책꽂이를 하나씩 구입해서 틈나는대로 조립하고 쌓아 단출한 책장을 완성하였다. 게으르고 정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 하얀 책꽂이가 바래가며 연미색으로 바뀌어가는 세월에 대해 생각하며 조금 소박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장의 빈 자리에 전혀 엉뚱한 것들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래봤자 그다지 의미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찮은 내 꿈이 꼭 그만큼으로 하찮게 엉클어짐에 낙담했으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어느 날에는 조립해서 쌓아뒀던 책꽂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버렸고 튼튼하지만 아주 버겁게 생긴 큼지막한 책꽂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새하얀 나의 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전혀 다른 용도의 물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투박한 책꽂이에는 겨우 두세칸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꽂혀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에 점차 익숙해졌고 이  모두가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려니 했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무색하게도 더 투박하고 더 높아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가 새로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아끼는 책들은 모두 엉뚱한 장소로 옮겨져 있었다. 다시 한번 화를 참기 어려웠고 그 책들을 닥치는대로 끄집어내어 보따리를 쌌다. 어딘가 전혀 다른 곳에 그것들을 방치하기 위하여.  잃어버릴 수도 있고 쉽게 삭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려니 할 것이다. 그것에 관한 예감을 갖고 있었던지 언제부터인가 책을 갖기 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를 더 좋아하고 필요한 부분만 기억하는 것을 더 즐겨한다. 많은 것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겠지만 그것이 영원한 망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믿는다. 그리고 흩어져버린 책의 운명은 <애플비씨의 질서바른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질서는 무질서에 패했고 그 무질서는 자신의 잘못과 죄에서 비롯된 것임에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살아 있는 한 감내해야 할 죄값인지는 납득할 수 없지만, 책들이 나의 운명인지 흩어져버린 책꽂이가 나의 운명인지 천장까지 다다른 텅 빈 책장이 그러한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다.

 

+스탠리 엘린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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