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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리고 여기

어느 날엔가 바빌론으로 가는 길목에 덩그러니 문 하나가 생겼다. 하나 둘 사람들은 점점 그 문을 통해 바빌론으로 들어가길 좋아했다. 이런저런 구경거리도 있고 목적지에 아주 조금 더 빨리 갈 수도 있었다. 문앞에 가게도 차리고 좌판도 차리고 살림도 차렸다. 조금 돌아가면 되는데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문으로만 들어가길 좋아했다. 오가는 이 모두가 비슷한 장사꾼들을 봤고 같은 소식을 들었고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반응들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다수는 각기 특별한 사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구의 것도 아닌데 문의 주인들은 거대해진 관문 너머의 풍경을 지옥의 모습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행인들에겐 그들이 그 지옥의 박해받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고 싶어 했다. 오웰의 텔레스크린엔 감시와 처벌이 따랐지만 그들은 스스로 원하고 온갖 부정과 불의와 모순에 분개하는 무대 위에서 오직 잘못은 이 문이 보여준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을 친절하게도 알려줬다. 침과 욕망을 섞어 만들어낸 허영의 집에서 모두가 정의로 불을 태우는가 싶지만 실은 헛된 정념이 끓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이는 많지 않았고 복두장이의 비밀을 말해주는 이는 더욱 없었다.

바빌론의 문 너머엔 온갖 좌판들이 펼쳐져 있고 광대들과 상인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소식과 웃음을 팔고 있었다. 문의 주인들은 순서를 만들고 점수를 매기고 그리고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비밀스런 족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었다. 주인들은 지옥처럼 보이는 무대 저 편에서 그들의 눈물로 진주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분노할수록 그들의 비밀스런 보석상자는 더 거대해지고 무대 위의 고통은 더 적나라해진다. 오멜라스의 어떤 사람들처럼 그곳을 떠나거나 멀리하고 있을 뿐 메이드 인 차이나를 떠나 살 수 없듯 그들을 떠나 살기도 쉽지 않다. 스스로 눈먼 노예가 되었으나 눈 번뜩이며 홀로 깨어 있는 투사인줄 알고 있으니 끓어오르는 분노와 욕망을 금으로 제련하는 비의는 그 뒷편 숨어 있는 주인들의 것일 뿐이었다. 더 높아지고 더 빛나는 금강의 세계가 당신보다 높은 곳을 보여주면서 그곳에 살지 못하는 당신을 나락이라 하였다.

조금 돌아가면 되는데 거기 돌아간 그만큼 조금 달리 보이는 풍경이 있는데 그 문으로 가지 않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결코 주인으로 불린 적 없는 주인들이 은밀한 폭력을 휘두르는 곳, 온갖 권세와 타락이 그 반대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바빌론의 문 저 너머 그곳이 어디인지 궁금하다면, 블랙홀의 내부가 어떤 형상인지 알고 싶길 원한다면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없어도 될 문이 없어지기를 원한다면.

 

/2016. 10. 19.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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