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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못한 꿈

냉동여행 Frozen Journey, 필립 K. 딕

 

▲ 그의 지난날
그의 이름은 빅터 케밍스다. 어릴 적에 도르키라는 이름을 지닌 고양이가 비둘기를 잡아먹도록 부추겼다. 네 살 때는 거미줄에 걸린 벌을 도와주려다 벌에게 쏘였으며, 마틴이라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화가의 친필서명이 적힌 꽤 값어치 있는 포스터 한 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보관했는지 아니면 찢어져버렸는지 불분명하다.

 

▲ 그의 오늘
새로운 행성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장거리 우주여행에 나섰으나 냉동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여 희미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주선에는 깨어서 생활할 만큼의 충분한 산소와 식량이 없는 까닭에 우주선의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과거를 반추하며 괴로워 하고 새행성에 도착할 가까운 미래의 환상을 접하며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 또 절망한다.

 

▲ 그의 내일
10년간의 끔찍스런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
또는 새로운 행성에서의 극적이고도 꿈같은 재회?

 
ARRIVE  ARRIVE3

 
필립 K. 딕 하면 영화의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블레이드 러너>(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토털 리콜>(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서 <임포스터>,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 첵>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그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진 까닭이다.(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정체성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냉동여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슐러 르 귄과 더불어 주류(?) 문학계에서도 거론되곤 하는 몇 안되는 SF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르 귄의 경우와 달리 그는 보다 ‘통상적인’ 형태를 취하곤 한다.

 

내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있어. 내 안에 말이야.
통증의 쓰라림. 무가치하다는 느낌.

 

애초에 그는 목표 행성까지 냉동수면 상태로 지냈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 여행 도중에 일부 의식이 깨어나버렸다. 불행히도 우주선에는 인간이 깨어서 생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우주선의 컴퓨터는 그를 수면 내지 가수면 상태로 유지하고자 애를 쓴다…..

그에게 닥친 부조리한 기억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곤 하지만 단 한번도 행복한 기억을 유추해내지 못한다. 우주선은 그에게 새 행성에 도착하는 시점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어 그에게 안도감을 주려 하지만 그마저도 번번이 그가 눈치채어버려 실패하곤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자그마한 잘못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태를 지속한다. 우주선 컴퓨터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격자처럼 엮어서 하나로 통합해놓은” 상태다.

우주선은 수많은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로봇의사를 보내고, 새 행성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곤 하지만 그의 예민하고 집요한 의식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제목을 살짝 고쳐서 이야기 하자면 안드로이드(우주선)는 끊임없이 전기양의 꿈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양의 꿈을 원했다.

 

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를 다시 영원히 냉동시켜 달라고 하자.
난 죄의식에 가득 찬 인간,
파괴할 줄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우주선은 결국 그의 아내를 호출하여 그가 새 행성에서 옛 아내를 다시 만나서 자신의 심적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었던 가상현실과 비슷한 형태로 새 행성에 도착해서 아내를 만나고 아내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다 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통해 그것이 꿈속의 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각성했던 그로서는 마틴이 새 행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현실의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냉동여행’도 그렇게 애매하게 끝을 맺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단편에 관해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빅터 케밍스처럼 정확한 해답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진정 깨어나서 아내 마틴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그 마지막 희망마저도 가짜이며,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마치 장주의 호접몽처럼 혼돈이 일어나는 순간이 온 것이고, 딕 자신의 다른 단편들에서처럼 자신이 과연 자기 자신인지, 현재가 그대로 현실인지에 대해 극심한 혼란에 부딪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한 인간의 모조품임을 결코 알아채지 못한 임포스터의 정교한 로봇처럼 꿈임을 알지 못하는 꿈이 무한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삶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블랙홀의 내부가 궁금하다면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된다던 어떤 이의 한줄처럼.

 

단편의 마지막은 어쩐지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는 포스터가 현실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찢어졌는지가 열쇠인데 그는 끝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서 혼란스럽게 한다. ‘플레이보이’를 통해 <냉동여행>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이 작품이 자신의 단편집에 실렸을 때의 제목은 <조만간 나는 도착하기를 희망한다>이라고 한다. 나도 진심으로 그랬으면 싶었다.

그리고 여기 이 단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화가 있다. 참으로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짧고도 길고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이야기의 모든 것이다.
케밍스의 고통은 끔찍스럽지만 도착지에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마틴의 말은 나를 부럽게 한다.

 

“…이것이 현실이면 좋을 텐데 말이오.”
마틴이 말했다.
“전 이 일이 당신에게 현실이 될 때까지 당신과 함께 앉아 있겠어요.”

i hope i shall arrive soon……

 

 

/2006. 3. 18.

 

무치

데.호따.무치

2 thoughts to “도착하지 못한 꿈”

  1. 꿈은 또다른 우주죠.
    그곳에 내던져졌을때 헤맬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두려운 이유이기도.
    내게 닥친일들이 모두 거짓이란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곳에 있을수밖에 없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또다른 꿈을 꾸고 싶어하겠죠.

    그는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곤 하지만 단 한번도 행복한 기억을 유추해내지 못한다…
    저랑 닮았네요..^^
    그래도 마틴의 말에서 위안을 받았을지 모르겠어요.
    저도 위안을 받아요. 어느 순간….어느말에서.

    1. 도착때까지는 동면상태로 있다 깨어났어야 하는데,
      아무런 생활/생존시설이 없는 우주선에서 그 이전에 애매하게 깨어버린 승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주선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계속 ‘가상현실’ 같은 것들을 만들어주며 시간을 보내게 하는데
      고통스런 과거만을 계속 불러오고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었죠.
      …그러니 마틴의 말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위안이었죠.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찾을 수가 없는 ‘복원지점’,
      어린 시절의 잘못들과 마틴에서 심히 다르지만
      서글프게도 어떤 인생의 축약본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프로즌 저니’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습니다.
      도착할 곳이 없는 꿈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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