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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사념 : 파사낙와의 시대

(Chega de Saudade : No Tempo da Bossa Nova)

 

1. 파서의 꿈

 

地球는 吾人의 住居하는 世界니 亦 遊星의 一이라.
ㅡ 서유견문, 유길준

 

‘希罗多德희라다덕’이라는 희랍의 학자가 입버릇처럼 즐겨 말했듯이 “나로서는 잘 믿기지 않지만” 직경이 이만육천십리나 된다는 박처럼 둥글게 생긴 지구의 저 건너편에는 ‘南亚美利加남아미리가’라는 별유천지가 있어 巴西파서라는 나라가 있다.

南亚美利加에서도 그 영토가 가장 넓은 이 나라는 남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葡萄牙포도아의 말을 쓰고 있으나 많은 국민들이 글자를 깨치지 못한 설움을 안고 살고 있다. 수도는 파서리아巴西利亚이지만 里约리약, 그러니까 ‘里约热内卢리약열내로’라는 이름의 풍광 좋은 도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백성의 대부분은 천주신앙을 지극정성으로 믿고 있으나 멀리 아불리가에서 유래한 무독(파서에는 이를 ‘마고파’라고 이른다)이라는 종교의 해괴한 풍속도 아직 남아 있다.

파서 사람들은 콩을 볶아 만든 咖啡가배라는 이름의 신묘한 차를 즐기는데 그 향이 워낙 짙고 독하여 한번 맛을 들인 사람은 헤어나오기가 힘든 것이 마약과 같다고들 한다. 또한 桑巴삼파라 불리우는 음악과 더불어 가무를 즐기는 습속이 있는데 咖啡나 桑巴나 그 맛을 본 사람들이 흠뻑 빠져든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저 세인들에게는 글월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미개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사는 야만의 땅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지구의 허파라 불리우는 애마존 지대의 원시림과 伊瓜苏大瀑布이과소대폭포의 장관에다 里约의 아름다운 해변과 삼파축제, 위대한 삼파와 巴萨诺瓦파사낙와의 가인들로 해서 더욱 이름 높은 나라다.
그리고 그 숱한 파서의 별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한량이 있었으니 시인이자 파서의 사신으로, 평론가로 가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이름은 费尼希邬斯비니희오사 迪摩赖斯적마뢰사다. 约翰列侬약한열농과 披頭合唱團피두합창단에서 시작된 나의 음악적 여정이 적마뢰사를 만나 그의 시가에 귀를 기울이니 내 삶의 행운이며 복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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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마뢰사의 풍자화 (38세 무렵)

 

적마뢰사는 여느 가인과는 한참 다른 경력을 지닌 사람으로 일찌기 영길리의 우진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며 19세의 나이에 이미 노래를 쓰기 시작했고 만 20세가 된 1933년 <노정 路程 O Caminho para a Distancia>이라는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33세에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아미리가 합중국의 도시 낙삼기의 부영사가 되어 파서의 사신으로 그 소임을 다 하였다.

외교관으로 일하던 40세 무렵에는 오비이사와 우려적희(Orpheus and Eurydice)라는 희랍신화에 근거하여 <오비오적의상(Orfe da Conseicao)>이라는 희곡을 세상에 내었는데 그가 음악과 연을 맺은 것은 이 희곡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오비오적의상의 음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무명의 작곡자 동교빈(본명 은동유 카루사 교빈)을 만나 평생의 친우가 되었고 두 사람은 더불어 숱한 가사를 지어 오늘날까지 널리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예술적 여정은 자신의 기념비적 작품 “성찬삼파”에 잘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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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발로 섭로달 + 적마뢰사

 

1958년에 세상에 알려진 노래 “만회사념(Chega de Saudade)”은 적마뢰사가 동교빈과 더불어 만든 최초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그 곡이 지금에 와서 파사낙와로 불리우는 가사형식의 시초가 되었다. 파사낙와의 교종이라 불리우는 길패두가 비파를 뜯고 애리채기 카도수가 노래하였다. 이 곡이 수록된 애리채기의 시가집은 지애적가, 즉 지극한 사랑의 노래라 불리운다.

바야흐로 느린 삼파가(Samba Cancao)의 전통에 작사악(Jazz)을 가미하여 한층 세련된 형식과 리듬으로 다듬어진 파사낙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동교빈이 곡을 짓고 만동사가 가사를 쓴 “주조(Desafinado)”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신경향’이라는 뜻을 지닌 파사낙와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어 이때부터 이러한 종류의 음악을 파사낙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음치’라는 제목의 노래가 파사낙와를 세상에 알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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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astao? : 적마뢰사, 애리채기, 동교빈

 

한편 마헐 카류라는 법국의 감독은 <오비오적의상>을 바탕으로 <흑인 오비오>(1959년)라는 활동사진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로역자 방법(루이즈 봉파)이 곡을 쓴 “가년화청신(Manha de Carnaval)”과 동교빈/적마뢰사의 “쾌락(A Felicidade)”이라는 시가가 파서의 음악을 육대주에 알리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 또한 작품성을 인정받아 풍광좋은 법국의 도시 감성(Cannes)에서 열리는 감성전영축제 대상작이 되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적마뢰사는 1966년의 전영축제에서 심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교빈과 적마뢰사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이파니마의 여해(Garota de Ipanema)”라는 파사낙와 형식의 시가였다. 어느 날 이파니마에서 만난 애로의사(Heloisa)라는 낭자에게 반해버린 동교빈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던 적마뢰사는 그를 위해 “이파니마의 여해”라는 시를 썼고 거기 동교빈이 곡을 붙인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파사낙와 가락이 되었다. 애로의사에 관한 동교빈의 연정은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노래만은 남아서 옛 사랑의 전설을 오늘도 전해주고 있다.(동교빈은 애로의사의 혼인식에까지 동부인 하여 참석하였다니 양반이 할 노릇은 아니었던가 싶다.) 하지만 애로의사는 추후 자신의 딸과 더불어 어느 도색화집에 나체의 초상화를 실어 동교빈의 순정을 무색하게 만들었으니 애로의사의 애로가 그런 것이었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기억함인지 지금도 파서의 리약이나 아미리가합중국의 장안 화성돈에 가면 이파니마의 여해를 기리는 “여해루”라는 반점과 “적마뢰사”라는 이름의 요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음주가’를 몹시 즐겼던 적마뢰사는 보리로 만든 술(碑酒)을 마시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만고의 명언을 남겼다.

 

꽃다운 청춘이라 하염없이 지내려니
쓸쓸한 이 내 마음 밤이 되면 잠 못 이뤄
파서 노래 듣는 객을 님인 줄 모르다니
언제나 좋은 기약 고운 님을 만나볼까+
ㅡ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만회사념(滿懷思念)”은 Chega de Saudade의 한역.
+말미에 인용한 글은 본시 매월당의 시인데 “남교에 지나는 객”을 글의 성격에 맞추어 “파서 노래 듣는 객”으로 바꾸었다.
+1883년 9월 유길준은 27세의 나이로 보빙사(報聘使)가 되어 미국을 돌아보고 1885년 12월에 돌아왔다. 1896년 4월 1일은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서유견문(西遊見聞) 1,000부가 발간되었던 날이다. 이작자의 이 글 또한 그에게서 배운 바 크다. 적마뢰사와 파사낙와에 관한 기록을 쓸 계기를 준 NCRW에도 감사한다. 다음 회에는 적마뢰사의 60년대 시가집들을 살펴볼 예정.

 

/2003. 3. mister.yⓒmisterycase.com

 

+<레코드방>에서 옮겨올만한 글이 별로 없었는데 보싸노바의 역사에 관해 무협지 풍으로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무려 13년 전에 쓴 것인데 계속 작업하려 했으나 인명, 지명, 노래 제목의 한자어 변환에 시간이 너무 들어 2편까지밖에 못썼다. 오늘 글 옮기면서도 조금 수정하고 추가했는데 만회사념 ㅡ ‘사념’을 돌아보며 적마뢰사의 시대에 관해 수정 작업도 하고 이어서 써볼까 생각도 든다./+2016. 8. 20.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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