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 속에 항상 들려오는
그대와 같이 걷던 그 길가의 빗소리+
는 아니다. 소리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1984년 채링턴 문방구의 다락방에서 윈스턴 스미스와 쥴리아가 마셨던 ‘진짜 커피’ 같은 느낌 ㅡ 예전에 좋아했던 어떤 원두커피의 조합이 생각난다. ‘마일스톤’이라는 회사의 제품이었는데 ‘아이리쉬 크림’에 ‘프렌치 바닐라’를 살짝 섞어 연하게 커피를 내리면 ‘아이리쉬’라는 단어의 어감처럼 맑고 깔끔한 맛이 났다. 그 커피 맛을 본지는 10년은 더 된 듯, 특별히 고급스런 제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상하게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어느 아이리쉬 가수가 흥청망청 즐거이 노래할 때 그녀의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무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앉아서 아코디언(반도네온)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내 눈을 끌었다. 마치 삶과 음악과 어울림의 기쁨으로 충만한 듯한 이의 모습 같았다. 그런 척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즐거움 밖에 없는 것 같아, 웃음 밖에 없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좀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찾아보려 했으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웃지 않는 그녀의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듯이. 삐아솔라 류의 어떤 엄정함도 고뇌도 없이, 케이준/자이데코의 고락과 애환도 아닌 시끌벅적한 축제만 있을 뿐이어서 그녀 자신이나 그녀가 참여한 곡 가운데 딱히 좋아할만한 연주나 노래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녀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묘하게도 내게 조금 위안이 된다. 그래서 가끔 그녀를 찾아서 본다. 도저히 풀 길 없는 마음에 약간의……
그리고 단 한곡, 그녀가 아코디언을 연주한 어떤 라이브는 마음을 울렸다. 슬픈 곡조여서 그런 것은 아니고, 연주와 보컬(그녀가 노래한 것은 아니다)이 무난히 마음에 들었던데다 그 곡이 내게 주는 의미가 각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지만 피들과 틴 휘슬 연주도 곧잘 한다. 그녀는 1968년에 태어났다.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데+
80년대의 허전한 끝자락은 그렇게 흩어졌으나 아코디언보다도 노래보다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오래 전의 아이리쉬 커피맛과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그녀의 웃음이다. 1968년으로부터의 웃음이 시끌벅적한 이국의 잔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어떤 구경꾼의 눈을 가득 채우며.
(커피는 결국 찾았다. 역시나 내 기억의 흠결 ㅡ 마일스톤이 아니라 밀스톤이었다. 그래서 다시 살펴보니 조금 달라진 포장의 프렌치 바닐라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이리쉬 크림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이리쉬의 향은 아이리쉬에게서 맡아야 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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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