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 관한 어느 책에서 승조 스님의 일화를 보았다. 환속하여 재상이 되기를 바라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한 까닭에 죽음을 당하게 된 그는 마지막 칠일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궤뚫은 <보장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스님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보르헤스를 생각나게 했다. <허구들>에 실린 단편 ‘비밀의 기적’이 그랬다. 사형을 기다리는 8시 44분에서 9시 사이, 그리고 격발의 순간에서부터 총알이 자신을 뚫고 지나가기까지의 찰나를 1년의 시간으로 연장시키며 자로미르 홀라딕은 필생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9시 2분, 창작의 희열 속에 그는 죽었다.
그리고 또다른 이야기들도 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관한 회상이라고나 할까… 스파이크 리의 <25시>에는 수감을 앞둔 주인공 몬티의 행복한 미래의 삶이 꿈처럼 이어진다. 가석방을 마치고 7년의 형기를 채우기 위해 교도소로 가는 길,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속에서 그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아버지의 계획과 선택을 따라 교도소로 가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다. 그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고 옛 사랑을 다시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교도소로 가는 길에 꾸었던 짧은 꿈이었다. 그는 반성하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고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환영 속에서 잠깐 현실을 잊었을 뿐이다.
또 필립 K.딕의 단편 ‘냉동여행’은 반대로 크고 작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에 사로잡혀 무한한 고초를 겪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광속 여행의 와중에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광년의 거리와 시간을 과거의 잘못과 고통들을 반추하며 보내는 것이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비밀의 기적과 고통의 무한반복이라는 극단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지점들이 있다. 내가 알거나 들었거나 전혀 모르는 비슷한 수많은 사연들이 거기 있을 것이다. 焉敢生心 , 홀라딕이나 승조 스님의 이야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게으름과 무기력을 물리친다면 소소한 몇 페이지 일기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밀의 기적’의 서두에 적절하게 인용된 코란의 구절 역시 이들 모든 이야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를 100년 동안 죽게 한 다음
그를 살려냈고,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ㅡ 너는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는가?
ㅡ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 또는 지상에서의 매미의 일주일 같은 삶의 길이는 찰나에서 거의 무한에 이르기까지 다른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승조 스님이 남긴 열반송을 사족처럼 여기 덧붙여 본다.
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五陰本來空 다섯 가지는 본래부터 비어 있었네
將頭臨白刀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
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베는 일과 같을 뿐이네
(‘사대’는 세상 만물을 이루고 있는 흙, 물, 불, 바람의 4원소를 의미하며 ‘다섯 가지’는 생멸과 변화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을 상징하며 그 각각은 물질, 감각, 지각, 마음의 작용, 마음을 의미한다.)
mister.yⓒmisterycase.com,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