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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있었다

금슬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다
시절이 변할까 늘 근심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걱정하누나*

 

일로 해서 <삼국유사>를 펼쳤다가 또다시 읽고 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봤을 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는 꽤 충격적인 느낌이었다. 남녀의 목욕과 성불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도 미처 생각못한 일이었으니 ‘金물’ 아닌 ‘禁物’로 하여(처녀로 현신한 관음보살과 함께 金물에 목욕하고 성불했다) 무엇인가 초현실적인 감각도 없지 않아 보였다.

유사에 수록된 향가들도 인상적이지만 말미마다 은근슬쩍 붙어 있는 그럴듯한 풍월로 해서 이야기는 더욱 빛을 발한다.(이상하게 그것에 관해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절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책자에 넣기 위해 선택한 삼국유사의 한 편은 <김현감호 金現感虎>였다. 오늘 어디엔가 이 땅의 야생호랑이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만 나로 말하자면, <이생감호>의 한 시절에 관해 믿지 못할 경험담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줄 안되는 축약으로라도 이야기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 호랑이였으나 나는 허당 같은 ‘이생(李生)’일 뿐이었다. 호랑이는 내게 목을 맡겼으나 나는 찌르지도 못했다… <김현감호>의 후반부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 속의 호랑이는 또 좀 다른 類다. 한 세월을 부부로 살다 옛 고향집에서 호랑이 가죽을 발견하고선 남편도 자식도 잊어버린 채 달아나버렸다. 어쩌면 나는 호랑이 아내의 가죽을 훔쳐서 숲속으로 숨어버린 또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김혼공의 딸에게 반해 낙산사 관음보살 전에 그녀와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평생 같은 헛꿈만 꾸다 끝이 났거나.(세규사의 스님에 비할 길 없어 나는 깨어나지도 못했다.)

지금도 어쩌다 탑돌이를 나가지만 결코 호랑이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했다고 믿은 어떤 선택이 참 어리석고 못난 짓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호랑이가 있었다. 불꽃 속에 연꽃이 있었다.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만 감아 청량에 이르리*

*삼국유사

 

2010. 1. 23. mister.yⓒmisterycase.com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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