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몰라보게 짧아졌습니다. 좀 늦은 시간에 산엘 갔더니 약수터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어둠이 내렸습니다. 큼지막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별이 새삼스러웠지요. 자그마한 손전등 하나를 갖고 갔는데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측백나무 빼곡한 길목 너머 어둠 속 옛길을 따라 返照의 시간이 왔습니다.
자전거엔 바퀴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전조등이 달려 있었고 캄캄한 논길 다닐 적에는 ㄱ자로 꺾인 국방색 손전등이 요긴했었지요. 큼지막한 6V 전지가 들어가는 묵직한 플래쉬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도둑은 들키지 않기 위해 침침한 손전등을 갖고 다녀야 했고, 늦은 저녁 도랑길에 플래쉬라도 비추면면 목욕하던 아낙네들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별이었던지 미지의 비행물체였던지 강둑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둥글고 또렷한 빛의 궤적도 기억합니다.
시골의 여름밤에 플래쉬 갖고 놀면 그보다 신나는 일도 별로 없었지요. 새 전지를 넣은 손전등을 하늘로 비추면 밤하늘에 뽀얗고도 환한 선이 그어졌습니다. 어둠을 뚫고 구름을 넘어 어느 먼 먼 별에서 그 빛을 끝내 발견하리라는 확신에 가까웠던 믿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플래쉬 자체가 영사기였고 위태로운 담벼락에서 밤하늘까지가 꿈의 스크린이 되었지요. 우리는 저마다 손전등을 들고 불나방처럼 흥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온통 흩뿌려진 별들에까지 닿을 듯한 그 아찔한 환희의 느낌이라니요. 생각하면 가끔은 발을 헛디딘 듯 떨어지는 느낌이고, 잠깐씩은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각성의 충격이 오기도 합니다.
한참 닳아버린 전지 같은 세월 너머 측백나무 우거진 길을 걷다 그 우유빛 빛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얼굴들도 보이고 발자국 소리며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어떤 목소리는 귓전에서 나를 부르고 어떤 목소리는 아득한 곳에서 재촉을 합니다. 누군가 어둠 저 너머에서 플래쉬를 켰나 봅니다.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떤 별에서도 응답받지 못한 그 빛이 세월을 돌고 돌아 내 캄캄한 하늘을 밝히는 몇몇 별이 되었습니다.
2008. 8. 30.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