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이미 낡아 폐기처분 되었는데 있던 것 쓰느라 비닐도 뜯지 않고 그냥 뒀던 전원 케이블이나 이제는 쓰지도 않는 기능들을 화려하게 자랑하며 어딘가 가만히 모셔져 있는 텅 빈 핸드폰 박스 같은 것, 책상 설합 한 귀퉁이에 새것처럼 남아 있는 존재하지 않는 시계를 위한 보증서, 루이뷔통 문양이 새겨진 낡은 갈색 비닐봉지나 이미 도수가 맞지 않거나 부서져서 버렸거나 잃어버린 안경의 케이스, 명품 상표가 새겨져 있는 출처불명의 옷걸이거나 책장 넘기다 문득 펼쳐진 페이지에 꽂혀 있는 오래된 가나 초콜렛 포장지,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핸드폰 박스 속의 이어폰, 몇 년이 지나도 한번 펼쳐보지 않는 책, 비닐도 뜯지 않은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나 어느 옷을 위해 예비된 것인지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할 단추들이 가득한 플라스틱 상자,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은행의 이름이 찍힌 오래된 적금 통장, 덜덜거리는 자동차의 금세 나온 제품 안내 같은 매뉴얼 책자, 포장도 뜯지 않았으나 설합 한 귀퉁에서 어떤 빛을 위해서도 어떤 움직임을 위해서도 어떤 명령을 위해서도 사용되지 못한 채 소리없이 닳아버린 한 쌍의 건전지, 그가 떨어졌거나 말았거나 선거가 끝난 거리 귀퉁이에 여전히 붙어 있는 웃음과 희망 가득한 현수막과 헛된 공약들, 몇 해 지난 연예잡지에 실린 빛바랜 사랑 고백, 얼어붙은 채 서서히 비상이 되어가는 냉장고 속의 청심환, 유효기간이 이미 지나버린 보험증서 같은 뭐 그런 것들 또는 그렇고 그런 것들, 무엇을 보증하는지 어디에 사용할 수 있는지 어떤 꿈에 귀 기울일 수 있는지 영화로움이 있었는지 알 길 없는 흔적들이 모여 만들어진 어떤 흐릿하고 긴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