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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접 猫接

꽃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 이장희

 

 

나는 미안했다.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해온 까닭이다. 사실이 그랬다. 단 한 번의 만남, 그리고 전화로 숱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지만 그녀는 즉각적으로 알아챘고 곧장 반응하곤 했다. 그리고 몇 걸음 훌쩍 더 나아갔다. 그럴 때 그녀 자신의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지 가끔은 궁금하다. 내가 그녀에게 준 것은 별로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생각했고,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수많은 꿈과 욕망을 가진 그녀에게 그 어떤 종류의 충족감이나 충만감을 줄 수 있을지 잘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자책감으로 뒤척이다 어느 순간 그는 깨어났다. 깨어났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묘하게 몸은 가벼웠고 나는 낯선 이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몸은 가벼웠고 나는 조용히 소리내지 않고 그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완전히 닫혀 있지 않은 문을 슬쩍 밀고 들어갔더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방에는 아무런 조명도 켜져 있지 않았고 창밖도 거의 캄캄한 듯 싶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방의 대부분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 한쪽에 펼쳐져 있는 잡지의 본문까지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 벗은 것은 아니었다. ‘La Maja Desnuda’ 보다는 ‘La Maja Vestida’에 가깝다고나 할까… 하얀 브래지어와 속이 살짝 비치는 팬티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는 흰 색 아니면 검정색이지. 어쩌면 하얀 색이 아닐지도 몰라. 밝은 분홍이나 크림 색깔일 수도……’ 하지만 내게 보이는 모든 것은 색감이 거의 사라져버린 흑백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흑백의 톤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고 드문드문 희미한 빛깔의 흔적이 있었으나 대부분 흑백에 가까웠다.

밤새 너무 뒤척였던 탓일까. 어떤 간절한 꿈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일까. 왼쪽 브래지어가 조금 위로 올라가 유두에 걸쳐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너무도 선명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어떤 짐승의 발이 그녀의 가슴에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짐승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고양이가 대체 저기서 뭘 하는 것일까. 제 홀로 그루밍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재래의 숏헤어인지 스팟이 인상적인 뱅갈인지 모르지만 드문드문 흰빛이 보이긴 해도 거의 틀림없는 잿빛 고양이였다.

 

 

튀어나온 발톱 두 세 개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 발톱의 주인공은 오른 발을 지긋이 눌러 발톱은 그녀의 젖가슴을 파고들었다. 고양이 발톱이 그렇게 가능한지 모르겠는데 뾰족한 두 발톱이 지긋이 그녀의 가슴을 누르는 모습이 너무도 적나라해서 감촉이 내게도 느껴질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조금 아프겠다 싶을 만큼이었고, 오른발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자 가슴에는 몇 개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어디서 키우던 고양이인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고양이는 왼쪽 발톱만 다듬어져 있었고 오른쪽 발톱은 아무렇게나 자란 채 그 하나는 일부가 깨어진 채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양이의 발은 다시 그녀의 가슴을 향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가슴에 두 줄의 상처를 내었고 나는 희미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들었다고 생각했다.) 몹시도 듣고 싶었고, 스스로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소리다. 그게 아픔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쾌감을 동반한 것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그저 고양이의 눈이 불타오르는 듯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움직임으로 그녀의 몸이 좀 더 확연히 드러났고 크지 가슴은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다. 이윽고 작고 까칠까칠한 돌기 가득한 혀는 희미한 상처를 핥다 젖꼭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낮게 가르릉거렸고 그녀는 잠시 몸을 움직이며 이전보다는 좀 더 분명하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새파란 수염이 어둠 속에 가늘게 떨리었다.

나는 마음이 다급했고 이 순간을 꼭 사진으로 남겨야겠다 생각했다. 지금 모습 그대로 흑백이 좋으리라 싶어 그렇게 세팅을 하고 플래쉬 대신 밝은 렌즈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직접 셔터를 누르고 싶지는 않아 자그마한 삼각대를 세우고 셀프타이머를 맞추고는 셔터를 눌렀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의 갑작스런 상황이라 그런지, 아니 모든 게 꿈이라 그런지 스위치 만지고 누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또 한 순간이었다.

다행이 고양이는 내 뜻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너무도 잘 움직여줬다. 누가 그랬는지 그녀의 팬티는 허벅지 조금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고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리, 아주 조금 빨라진 심장의 박동소리도 들렸고 모든 것이 분명해진 듯한 그 순간 셔터 음이 울렸다.

소리에 놀란 고양이는 그녀의 가슴에서 앞발을 떼었고 그녀는 뒤척이다 옆으로 누웠다. 그녀의 손이 거의 닿기 힘든 곳, 등의 가운데에도 희미하니 복선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그녀는 다시 엎드려 누웠고 고양이는 그녀의 엉덩이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끈적이며 나를 유혹하는 또다른 어떤 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틈새로,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살금살금 다가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고양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각성 너머로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편으론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으나 또 어쩌면 바로 내 근처에서 들리는 소리인 것도 같았다. 그녀 곁에 붙어 있던 고양이의 울음은 분명 아니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조금씩 그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엉덩이로부터, 그녀의 고양이로부터, 그리고 내 마음의 카메라로부터.

깨어나니 거의 사용한 적이 없는 삼각대는 내 방에 그대로 서 있었다. 창문 아래 화단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꿈이 너무도 선명하여 나는 일어나 책상 위에 있는 카메라를 갖고 와서 다시 누웠다. 어떤 사진이 찍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잠시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잠결에 카메라 만지다 그리 되었는지 검지 손톱 한 귀퉁이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비가 본 것을 나는 여태 보지 못했고 나비가 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나는 보았다는 것, 그래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2013. 4. 13.

 

 

*거의 이십여년 전에 썼던 노래의 몇줄을 떠올리다 호접몽(胡蝶之夢)이 ‘나비’의 꿈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묘접(猫接)’이란 단어를 생각해냈다. 묘접의 접은 ‘사귈 접(接)’이다.
*네거티브 사진은 프란츠 로흐의 <고양이가 있는 누드>를 반전시킨 것이다.

 

*Butterfly / Crazy Town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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