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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리

날씨는 버거울만치 무더웠고 길은 여기저기 정체가 심했다. 박물관은 그 본래의 기능과는 별 관련이 없는 무질서와 무례, 그리고 카메라 플래쉬의 경연을 관람하기 위한 장소처럼 보였다.
경주엘 잠시 다녀왔다. 집안의 일도 좀 보고 그리고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어느 옛 스님이 즐겨 피리를 불고 시를 읊었다던 장소를 찾아갔다.

천년고도에 관광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천왕사터 도로변에는 안내판조차 제대로 없었고 믿었던(?) 네비게이션도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지는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장소에는 당간지주만 휑하니 서있었을 뿐,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도 발굴관계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휴일이어서 그런지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덕만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여왕의 능이 근처에 있는 까닭에 옛 절터의 전망이라도 볼 수 있을까 막연한 요행수를 바라며 무작정 샛길로 해서 언덕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산을 올랐다. 전날 무릎을 좀 다쳤으나 그 순간에는 불편한줄도 잘 몰랐다. 땀 뻘뻘 흘리며 5분쯤 쉬지 않고 걸었더니 거의 꼭대기 가까이에 이르렀고 시원한 바람이 좀 부는가 싶더니 금세 왕릉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왕의 무덤은 상당히 큰 크기였으나 기단부의 거친 돌에서 보듯 대체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왕릉에 세워져 있는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에 만들라고 했으며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신하들이 위치를 물었더니 낭산 기슭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낭산 기슭에 영면한지 10여년 후에(일반적으로는 이와 달리 문무왕 19년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 아래쪽 넓은 터에 사천왕사가 들어섰다고 한다.

<유사>에 이르기를, 도리천이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사천왕이 머무는 곳 위에 있다고 하니 여왕의 무덤이라는 결과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곳의 존재를 증명해줄 근거가 뒤늦게 자리를 잡았다고나 할까… 없는 향기로 해서 더 깊은 향을 보여주었던 옛 여왕의 전설이었다.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산 중턱에는 용을 든 증장천왕, 검을 쥔 지국천왕, 비파를 갖고 있는 다문천왕, 왼손에 탑을 든 광목천왕으로 불리우는 사대천왕이 머물러 도리천을 지킨다.)

결과와 원인의 미묘한 역전 때문이었을까. (내용은 좀 다르지만) 왕릉과 사천왕사에 얽힌 이야기는 묘하게도 보르헤스의 <초고속 승진을 시킨 마술>이란 단편을 생각나게 했다. 천일야화의 외전에 실렸던 이야기를 보르헤스가 ‘다시 쓴’ 것이다.
저녁 식사를 앞둔 어느 마법사의 힘으로 순식간에 신부에서 교황까지 이른 어떤 사람이 (마법을 행하기전 마법사는 저녁식사로 메추리 요리를 먹고 싶으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만들지 말라고 명한다) 약속을 저버리고 마법사의 부탁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자 (돌아갈 때 먹을 음식을 부탁하자 그마저도 주지 않겠다고 한다) 마법사는 메추리 요리를 만들라는 분부를 내리고 모든 일은 처음대로 돌아와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부덕함만 마법사에게 속속들이 보여준 결과, 모든 것은 처음으로 와서 신부는 일언지하에 쫓겨난다. 도리천과 사천왕사,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역전에 대해 생각하며 능에서 내려오는 길에 검은 물잠자리 한 마리가 내 앞의 풀꽃을 오가며 한참을 따라 날아왔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 생각하며 잠시 둘러봤을 뿐인 낭산은 거문고 타던 백결선생이 거처했던 곳이고, 최치원이 책을 읽던 장소이며 월명사가 ― 도리천에 이루어진 옛 여왕의 영면처럼 원인에 앞선 ‘결과’로 느껴지는 ― 불멸의 시를 썼으리라 여겨지는 곳이다.
마법사의 저녁 요리와 같이 이미 이루어진 결과를 돌이킬 수 있는 어떤 주문, 어떤 ‘문두루’도 없기에 월명리는 여태 지도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경주 어느 마을의 이름이다. 바람결에 글 몇줄 새길 날 기약하며 홀로 그리고 또 그려보는.

(돌아오는 길에는 안압지 부근에서 연꽃 구경을 했다. 옷걸이 속에 연밥이 그려져 있던 일련의 그림들과 더불어 수화기처럼, 혹은 송화기처럼 생긴 연밥 보면 늘 어떤 불가해한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월명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떠난 누이의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 소리는 밝은 달 일깨워 항아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一然 讚)

 

 

/2008. 8.12. 19:11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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