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원유경 옮김, 새움
적어도 나는 내 자신을 위한 새로운 즐거움을
하나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고독에 고양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이상한 결핍을 깨닫게 되었다.
― 소나무 숲에서 보낸 하룻밤, 스티븐슨
비박(프;bivouac, 독;biwak) 또는 빈티지(영;vintage) 같은 단어들은 묘하게도 우리말과 외래어가 비슷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러모로 독특한 느낌을 풍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단어들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한 것이 바로 스티븐슨의 여행기였다.
좀 엉뚱한 시작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의 장정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장도 아닌 단순한 하드커버의 제본은 이 책을 뻔질나게 들고 앉은 것이 아님에도 벌써 여기저기 갈라지고 있다. 게다가 겉멋이 많이 들어간 듯한 조판은 안쪽 여백이 지나치게 많고 바깥은 거의 여백이 없는 지경이 되어 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내가 까다로운 것인지 가끔씩 눈은 산만하게도 책 바깥을 향하곤 한다.)
스티븐슨의 단출한 여행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어쩐지 이율배반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스티븐슨의 짧은 여행과 그 여행에 관한 기록,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티븐슨이 1878년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여행과 노숙에 필요한 장비를 싣고 프랑스 남부 외지에 위치한 세벤느 지방을 여행한 12일간(1878년 9월 22일에서 10월 3일까지)의 기록이다.
별다른 극적인 사건도 없지만 소박한 느낌과 더불어 세벤느 지방의 역사와 종교적 분위기, 그리고 여행의 단상들이 잘 묘사되어 고산 오지의 상큼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늑대의 후예들>이라는 영화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제보당 지역(그 자신도 늑대 괴물에 대한 전설 때문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고초를 당하기도 한다)에 대한 이야기도 꽤 흥미롭고 이런저런 종교적인 역사와 그에 따른 에피소드들도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티븐슨의 여행기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자유로움을 한껏 누렸던 한 사람의 섬세하고 사려깊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날은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매한 장소에서 비박을 하고, 어떤 날은 누추한 여인숙에서 잠을 잤으며, 또 수도원에 잠시 머무는 동안 수도사와 논쟁을 하는 등 그의 12일은 다양한 경험과 자유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1903년 이래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채비로 그의 길을 따라 여행을 하였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나로서는 당장에라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박에의 유혹’이 제일 컸다.)
스티븐슨은 44년의 짧은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여행하며 꽤 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삶 자체가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특히나 오래도록 미국대륙을 방황한 끝에 다시 만난 11세 연상의 이혼녀 패니 오스본과의 결혼 ― 세벤느 여행 자체가 패니 오스본이 남편의 강요로 영국에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간 후에 이루어졌다 ― 은 그 절정이었으며, 하와이와 사모아에서의 말년 또한 그러하였다. 그의 삶이 너무 짧았음에 안타까움이 많지만 그 삶이 결코 짧지 않을 만큼 그는 살았다. “여행을 꿈꾸는 것이 그곳에 도착한 것보다 낫다”던 언급 또한 그 자신이 대단한 여행가였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별빛 아래서 내 가까이에 누워 있을 동반자를 소망했다.
언제든지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침묵하고 있는 동반자를.
거기에는 심지어 고독보다도 더 조용한 친교가 있다.
모든 것이 가볍게 이해되는 완전한 고독이.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들이 문밖에서 지내게 된다면,
가장 완벽하고 자유로운 삶이 되는 것이다.
― 소나무 숲에서 보낸 하룻밤, 스티븐슨
이 마지막 두 줄에 있는 절실함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2005. 7. JJ.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