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 보르헤스
바람도 선선한 가을날입니다. 늘 다니던 길에서 새로운 가게 하나를 발견한 것처럼 늘 보던 화단에서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나무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델리아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새로운 느낌, 오래도록 여기저기 뒤적여 왔으나 너무 짧은 글이어서 그냥 무심하게 넘어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헤매이면서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을지요.
내 기억 속에도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어디쯤에서 헤어졌는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나 자신이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듯 Flashback의 느낌을 갖곤 합니다. 그의 짧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11번가의 모퉁이는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아스라한 순간이 남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내 마음의 잔상은 흔들리며 흐릿해지곤 합니다. 죽음이 지닌 감당키 힘든 위력 가운데 하나 ㅡ 그가 말한 ‘거짓 기억’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상이 흔들리는 것일 뿐, 그것은 그 글자의 본래적 의미처럼 이미지가 아닌 것이어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무엇이 있습니다. 아마 그가 붙들고자 하였던 델리아의 본질도 분명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울리카>에서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영원이란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짧은 글을 통해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를 내 빈약한 가슴속에 깊이 깊이 각인시켰습니다.
지구 저 반대편에서 수십년 전에 존재했던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사연에 전도되어 11번가의 모퉁이를 바라보는 이 느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지요. 하나같이 너무 구차한 사족인 것만 같아 두 페이지에 불과한 델리아의 이야기를 내 마음의 카메라에 수없이 담고 또 담아봅니다.
Some sunny day… 어딘지 언제인지 알지 못하지만 다시 만나리라던 비러 린의 노래가 꼭 그러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한 부분+ ㅡ 나도 더불어 비러 린에게, 스탠리 큐브릭에게, 보르헤스에게, 그리고 델리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는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사가 없어도 분명 그랬을테지요.
델리아, 언젠가 우리는 다시 서로 이어지게 되리라.
어느 강가에서?
이 불확정적인 말,
우리는 한때 우리가 평원 속에 묻혀 있는 한 도시 속에서
정말로 보르헤스와 델리아였는지 자문해 보게 되리라.
ㅡ JLB.
+마르띤 삐에로.
/2003.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