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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마법사

물속으로 떨어지면서 물의 표면에 파문을 만드는 조약돌처럼,
물의 깊이를 측량하려 한다면 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ㅡ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올해는 모두에게 평화로운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막 희생된 처녀들 이외에는 어떤 제물도 필요하지 않으며, 옥수수 농사는 이번 카투운에서 유래가 없는 풍작이 될 것입니다. 쿠쿨칸께서는 이제 치첸이차에 흑요석의 단검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더이상 태양의 신고를 위해 심장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리라 하였습니다.”

멀리 카라콜에는 이 깊은 밤에도 누군가 하늘을 헤아리고 있겠지만 돔의 창문에 불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이야말로 밤하늘을 가장 많이 닮은 곳, 별빛이 있는 한 불을 밝힐 수 없는 장소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늘밤도 새벽을 지켜보며 별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직업이기 이전에 그의 삶 자체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야의 많은 여인들이 그러하듯 그의 베개 밑에 장미꽃을 넣지도 않았다.

대신에 아름다운 엘 카스티요에서 착물의 가슴에 꽃을 바치며 그녀는 기도했었다. 하나의 단과 사방으로 제각각 91개의 계단을 가진 그 신전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간절히 염원했었다. 계단의 총합은 1년의 완성임과 동시에 기원의 실현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치첸이차의 외곽 마을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사시斜視가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딸들의 눈 앞에 조그마한 공을 달아 사시로 만들지 않았고, 아들들의 이마에 판자를 묶어 마야의 피라밋처럼 생긴 우아한 두상으로 변형시키도 않았다. 따라서 그들 남매들은 결코 미남도 미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름답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성스런 연못을 두려워 했다. 태초의 바다 같은 그 짙은 초록빛이 무서워 그녀는 연못속에 손 한번 넣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많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듯 그 심연에 무시무시한 용이나 거대한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깍아지른 바위벽에 둘러싸인 연못을 떠도는 것은 그런 추상적인 괴물이 아니며 그것에 관한 진정한 두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녀는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이차 부족이 ‘아(하)’라고 부르는 물, 그들의 이름 또한 ‘물의 마술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물에 매혹된 물의 노예들인지도 모르겠다.

성스런 연못은 전사의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멀리 남쪽의 중앙지역으로는 카스티요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해골 장식이 가득한 촘판틀리와 마야에서 가장 큰 구기장이 펼쳐져 있다.(그녀는 폭타폭을 한번도 관람한 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차의 모든 두려움과 기원은 이 연못에 집중되어 있었다.

해마다 19의 달  ㅡ 불길한 와이엡의 마지막날에 연못에서는 물의 신을 위한 제전이 열린다. 이곳에서는 포로들의 심장이 흑요석 단검으로 도려내어지는 대신 아리따운 처녀들이 수장되는 것이다. 제관의 뜻과 가문의 순번과 정교한 천문법칙에 의해 오래전에 그녀가 선택되어 있었다. 아무도 공공연히 그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녀 자신의 태도야말로 가장 당당한 것이었다. 카라콜 별지기가 수십년 동안 바라보았던 어떤 별빛보다도 초롱초롱한 눈빛이그것을 말해주었다.

제관 하약스킨이 건네주는 황동의 잔을 받아 팔체를 마신 그녀의 정신은 서서히 혼미하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늙은 하약스킨의 눈빛이나 주민들의 기도와 함성이 그녀를 연못 속으로 밀어넣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는 그토록 무서워하던 연못 위를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마술사는 마술사가 아니었기에 꽃으로 치장된 뗏목에서 뛰어내린 그녀는 곧장 아래로 아래로 빠져들었다. 그녀를 포함한 다섯명의 처녀가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다. 다들 환각상태였음에도 호흡에의 본능을 어찌하지는 못해 비명을 질러대고 손을 휘저으며 허우적대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만이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헤엄을 쳐서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깊은 곳이기에 그녀는 차라리 그 물을 호흡해야 했다. 어둡고 탁한 그 물은 비의 신 챠크의 숨결같은 것, 그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침착하게 손가락 마다에 끼워진 금박이 입혀진 구리반지를 빼내어 뿌연 물길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 순간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 형체를 잘 알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그녀를 향해 아주 느리게 헤엄쳐 오는 것을 보고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칫 물 위로 올라갈뻔 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괴물이 아닌 오래전에 이곳으로 쓰러져 썩어버린 큼지막한 나무둥치였다.

함께 제물이 된 처녀들은 하나같이 가쁜 숨을 참지 못하고 물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관의 물음에 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숨쉬기에 바빴고 그들은 곧장 막대로 떠밀려졌다. 그녀는 안타까워 힘껏 외치려 했지만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으니 그네들에게 전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홀로 두려움에 떨며 기다렸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물의 흐름이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전의 통나무는 서서히 그쪽으로 움직여갔다.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는 빛을 모두 삼켜버린 듯 사방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풍요로운 한해가 되기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이 땅을 풍족하게 할 비를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부모님과 제관과 질투어린 눈길을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내겐 없다고 믿는 적의 창을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하나뿐인 그 사람을 다시 보기 위하여
그의 하늘에 단 하나의 광점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걷네

 

모든 처녀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야 그녀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가 겨우 깨어난 곳은 전사의 신전 곁에 있던 조그만 움막이었다. 하약스킨은 그녀가 대신 읊어준 예언에 적이 만족하였지만 이제 더이상의 제물이 필요없다는 그녀의 말에 몹시도 실망한 듯 눈을 홀겼다. 하지만 쿠쿨칸의 전갈이라는 말에는 그도 어쩌지 못하고 몸을 움찔하였다.

착물은 여전히 피의 쟁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치첸이차의 연못에서는 그다지 많은 여인의 뼈를 볼 수 없기를 그녀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친지들과 수많은 이웃들의 축복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멀리 카라콜의 현창 사이로 달이 그윽한 빛을 발하고 있다. 어느 창에선가 이 밤에도 그는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박투운의 세월이 스무번 돌아가는 동안 그녀의 눈빛도 그곳에 있었다.

 

 

/2000. 6.

 

 

 

+이 글에 나오는 단어들 가운데 제관의 이름을 제외하고 지어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재하는 건물이거나 장소이거나 단위의 명칭이며, 오래 전에 쓴 글이라 흐릿하지만 제관의 이름도 그의 캐릭터에 맞추어 마야에서 사용했던 두 단어를 붙여서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나와틀어에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진 단어와 다른 단어 하나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엘 카스티요(쿠쿨칸의 신전)’는 윗쪽 사진의 피라밋이고, 그 앞에 있는 석상은 ‘착물’이다. 폭타폭은 인신공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기 경기의 이름이며, 그가 있었던 카라콜은 천문대이고 사진은 낮의 카라콜을 네가티브로 바꾼 것이다. 박투운은 날짜를 재는 단위로 144,000일, 그러니까 약 400년에 해당한다.(‘카스티요’와 ‘카라콜’은 스페니쉬다.) 하지만 카라콜에서 별을 헤아리던 이는 몇해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부터 영영 달아났다. 박투운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2000. 6.

 

Agua de Estrellas를 듣다 여기 링크했다. 우측 상단의 플레이버튼을 누르면 들을 수 있다. (그것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릴라 다운즈의 노래가 여기 있었나 보다. 하단의 까라꼴 그림 링크까 깨어져 있어 바로잡았다. /2021. 1. 7.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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