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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로 걸다 ‘

띄엄띄엄 외우지도 못할 긴 번호입니다. 벽지 구석마다 얼룩이 잦아들면 빗방울 소리가 나를 대신합니다. 부엌 창틀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르고, 팬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다릅니다.
띄엄띄엄 알지 못할 긴 번호를 눌러 봅니다. 낮은 구름장이 붉은 빛을 띤 새벽, 발신음도 들리지 않았는데 급한 걸음들이 달려갑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그 소리는 늘 틀림없는 번호로 이어집니다. 계란 껍데기 가지런히 둘러져 있는 화분에 닿는 소리가 다르고, 철벅이는 발자국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릅니다.
마음의 틈새마다 사방 벽지마다 참한 얼굴로 솟아오릅니다. 잠들 무렵이면, 어두운 손길마다 하나씩 훤히 불이 켜지고 머리칼의 길을 따라 빗소리가 가지런히 나를 다듬습니다.

 

 

/1999. 9. 16.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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