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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사회

“나를 믿을 수 있어?”
“아니, 널 믿을 수 없어. 너는 너무 무능해. 너의 ST가 너무 나빠.”

오래 전에 그녀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 오래 전이 얼마 만큼의 시간인지 그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분명 몇달 또는 1, 2년 보다는 더 흘렀음을 알지만 그 이상은 도무지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대형 크레딧 매장에 들러 맥주를 사고 싶었다. 모처럼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고…
체커. 언제나 매장의 정문을 들어서거나 나올 때는 신기했다. 어떻게 알수 있을까… 눈을 인식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손의 지문을 비접촉의 교묘한 방식으로 판독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욱 빈털털이인 그의 마음을 검색하는 것일까. 단층촬영의 방식으로 그의 갈비뼈에 뫼비우스 코드를 기록하고 스캔하는 것일까…
어딘가에 블랙박스가 있었고 그것은 물론 조난 이후라야 개봉 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이 안정된 사회 속에서 물가는 결코 변동이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물건의 가격은 일정 수준에서 거의 영구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다른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좀처럼 수정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불변의 경전이었다.
그럼에도 물가는 결국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 가격과 자신의 크레딧의 조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용신뢰도는 급전직하의 추락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숫자를 볼 때마다 마음은 더 참담했다. 어디 공동 작업 센터나 리싸이클 센터로 가면 어느 정도는 레벨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힘겹게 다니는 노인을 잠깐 도와주거나,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거나, 지금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정신지체아동을 위해 약간의 도움을 줘서 그가 도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ST 레벨을 잘 유지하려면 좀 귀찮고 비참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고난에 빠진 누군가를 찾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 휴지조각을 찾아서 줏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참담함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그는 점진적 개선이라는 상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낮엔 우연히 시동이 잘 안걸리는 자동차로 애를 먹고 있는 할아버지를 도와주었다. 그냥 그 앞에서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 뿐… 뭐가 잘못된 것인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다. 
이미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없는 세상이었다. 착한 일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수치로서 보상받고 처벌받으니 모두가 자업자득인 것, 자신의 행운이고 문제일 뿐이었다. 
만약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면 넘어져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일으켜 세운 자신이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내 ST를 향상시켜줘 고마워요.” 하지만 그런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거나 상냥한 미소를 보내거나, 아무런 까닭도 없이 고맙다 생각하고 말해도 ST는 조금씩 개선되는 법이고 실제로 그렇게 즐겨 말하는 구두쇠 같은 인간들도 몇몇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지쳐 있었고 피곤했고, 너무 많은 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CM의 출구 ㅡ 자신이 서 있는 줄에서 그의 ST 레벨이 최악의 수치로 출력되었을 때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급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몹시도 부끄러웠던 한 순간이 지나고 허탈한 느낌이 몰려왔다. 그리고 의혹의 그림자도 거기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왜 자신보다 더 낮은 신용도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뒤처진 낙오자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은 진정 의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미지근한 캔 맥주를 따서 마셨고, 간소한 침대에 누워 Self-Vision을 켰다. SV조차도 그의 크레딧 폭락을 가장 큰 화젯거리로 다루고 있었고, 끊임없이 경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SV도 그러할까. 이런 도덕-경제 이야기만 가득하고, 노래는 캠페인 송만 나오고, 영화는 의식고양을 위한 교훈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분명 그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딘가 향기가 분명 있었다.
그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힘겹게 채널을 돌릴 수 있었다. 어느 채널에선가 신용과 사회에의 기여에 관한 지루해 보이는 영화가 시작될 참이었다.
잠결이어서일까… 그 영화의 주인공은 꼭 자신처럼 보였다. 그의 상대역은 오래전에 가버린 그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른한 마음은 이미 눈을 감았고 잠결에 큰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깨어보니 그녀 혼자 남몰래 눈물 흘리며 크레딧 마켓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잠깐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밤새 행군을 하고 온 사람처럼 온몸이 쑤셨다. 그리고 창문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한때 이 방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전 세계의 많은 음악들을 집대성한 보기드문 최고의 데이타 베이스가 있었고, 아무 쓸모 없지만 정교하고 아름답게 생긴 항해용 나침반도 있었다. 곰팡내가 날만큼 오래되었고, 무슨 의미를 담고있는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몇 권의 아름다운 책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텔레비전, 냉장고, 간단한 주방도구와 세면대,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SV, SR(Self-Radio)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 아침을 먹는 고역을 대신하여 반컵 정도의 우유를 마시고는 잠깐 바깥 공기를 쐬고자 했다.
어디에나 있는 체커. 이 슬럼가에서조차도 그는 거의 최저 레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카운터가 0을 켜고 있었다. “쳇, 0이라니. 고장인데도 아무도 관심도 없군…”
하지만 주거지역을 벗어나 교육지역을 통과할 때 살펴본 체커에도 어김없이 그는 0을 기록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숨이 막히고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0. 그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꿈의 숫자였다. 인도 최고의 마법, 마야의 신관과 천문가들이 헤아리고 싶어했던 꿈, 충만과 공허의 극점에 있는 무엇… 그것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가슴 벅찬 일,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나눌 수 있는 황금의 열쇠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체커는 어김없이 자신이 레벨 제로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불신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Meta Market으로 달려가 한구석의 Sound Part를 뒤졌다. 그리고 뛰는 가슴으로 물건을 골랐다. ㅡ Virtual Sphere Sound System.
자신의 신체를  정확히 계산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반경에서 마음껏 실컷 큰 소리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허리띠 버클형의 VS3를 구입하였다. 정말 얼마만에 들어보는 음악인가. 
그가 자신의 VS3와 음악 데이타를 고민끝에 처분해버린 것은 ST 유지를 위한 비참한 시도이기도 했지만 거의 아무도 거기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길고 혹독했던 외로운 시간, 한번씩은 그녀에 관한 느낌 만큼이나 그리운 소리들이었다. 
VS3의 소리 반경을 개방시키면 공공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ST 레벨이 나빠지겠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꿈도 꾸지 못할 너무 높은 레벨이었기에 기꺼이 소리로 이루어진 구의 장막을 열었다.
엄청난 볼륨이 사방으로 뻗어나갔을 때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깐 놀랐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모두 영상-감각합치형의 Meta Sphere를 좋아할 뿐이었다. MS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결국 세상의 중심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그는 Self-Radio에서 나오는 지리멸렬한 노래들을 잠깐 떠올리다 뛸 듯이 기뻐했고 정신없이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한참을 걷고 달리다 보니 지구라트형으로 건축된 휘황찬란한 큰 건물이 보였다. “참, 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방구석에 처박혀 지낸 것일까. 이 근처에 이런 건물이 있는지도 몰랐다니…”
건물의 영롱한 네온싸인에는 Karma Hotel이라는 이름이 날렵한 글씨로 적혀 있었고, K.A.R.M.A.가 순차적으로 소멸하고 다시 켜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Karma 네온이 어둠에 잦아들 때면 형광빛 램프로 “Well, We All Shine On!”*이라는 글자들이 대신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레벨 제로의 당당함으로 KH의 화려한 입구를 거리낌없이 통과하였다.
그를 맞이한 호텔 웨이터는 ST 레벨이 준수한 아주 활달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따뜻하게 그를 접대하였고, 그의 마음에 꼭 들만한 최상층의 가장 매력적인 룸으로 그를 안내하였다. 그 방은 Flashback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호텔 최고의 시설이었고 평생토록 꿈꾸어온 순간이 거기 있었다. 놀라운 방에 관한 경외감과 찬사로 그는 웨이터에게 소정의 ST를 주고 싶었지만 그는 미소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웨이터가 문을 닫고 나가자 거기 자신의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극단의 꿈의 향연이었고 악몽의 조합이었고 아파도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이었다. 
무한에 고양되고 도취된 그는 온갖 즐거웠던 순간들의 꿈을 꾸며 달콤하고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룸 써비스가 전혀 필요없는 그 방 자체가 완벽한 세계였다. 그는 그 긴 밤의 한 가운데서 그녀를 만났고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레벨 제로의 길을 보았다.

카르마 호텔의 웨이터가 방을 정리하기 위해 손님의 부재를 확인하고 들어왔을 때 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신용유지국의 확인증을 보는 아주 짧은 순간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었지만 그는 그게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아주 길고 험난한 시련을 넘어 발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리고 망각해버린 무엇이었다. 그는 즐거운 휘파람을 불며 FB의 문을 잠갔다. 
그가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방의 이름은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영원토록 지속될 Feedback이었다. 다른 누군가의 부재에 다시 직면할 때까지.

ㅡ 나를 믿을 수 있어?
 

1999. 8. 17. jjlee(c). * Instant Karma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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