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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

19XX년 처음 무지개 마을에 갔던 날 제 ‘더블백’ 속에는 세탁하지 못한 속옷도 꽤 있었습니다. 저는 졸병이었고 그것을 씻거나 버릴 겨를도 없이 그곳에 도착했지요. 전기는 들어왔지만 수도설비도 없는 곳이었고, 사람들은 산 기슭의 웅덩이에서 호스를 연결해 식수로 사용하는 부산과는 격리된 듯한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물갈이’라고 하는 심한 배앓이를 했었습니다. 거기 도착한 첫날 입출항통제초소의 소장은 그런 저가 안스러웠던지 어디서 처녀 한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얼굴이 그야말로 새카만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너무 야위어 있는데 놀랐고 몸무게는 아마 40kg이나 될까 싶었습니다. 그녀가 제 속옷을 손으로 다 세탁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 하나였고, 그 부끄러움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지만 군복이 그걸 숨겨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산에 그런 마을이 있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 곳입니다.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그것은 제게 고향에의 그리움을 깊이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름엔 조그만 배를 타고 마을 앞에 있는 모래섬에 놀러가기도 했고, 낚시도 했습니다.

봄의 밤바다에서 숭어가 뛰는 소리를 들었고, 가을의 새벽 아침에 돌아오는 전어잡이 배들의 기쁜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을 전어는 깨소금 세말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하곤 하지요. 선박입출항신고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초소였습니다.

초소의 옆집에는 철없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고, 저는 그들과 참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와 동향이어서 정을 더 많이 나눴지요. 철없는 그들 부부는 일도 하지 않고, 조금 재산이 있었던지 마냥 놀며 지냈습니다만 저는 그들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귀여운 아이들도 생각나는군요.

신부는 예전에 호호아줌마 만화에 나오던 할머니처럼 마음씨 좋고 인심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들 부부의 할머니와도 참 잘지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통하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지요.

그들은 개 한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개가 어디서 극약을 먹고 와서 괴로워하며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남편은 결심을 한듯, 어디서 밧줄을 갖고 와 개를 붙들고는 초소옆 담벼락에서 목을 매달았습니다. 한 오분, 십분이나 흘렀을까… 개는 계속 바둥거렸고, 평소와는 빛깔이 달라 보이던 고통스런 초록빛 눈이 아직 기억납니다. 그 개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저는 계속 공포 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부부의 가족들은 제가 있는 동안에 밀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는데 정말 마음이 허전해지는 순간이었고, 그 집은 이후 개척교회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장은 마을의 구멍가게집 처녀와 저를 연결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네요. 박정자는 가끔 바지락을 갖고 초소로 왔습니다. 초소에 있던 전기밥솥에 삶아서 같이 먹고 그랬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오빠는 그녀를 심히 구박하였고, 하나뿐인 여동생 또한 언니를 무시하곤 했습니다만 그녀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지 정붙일 때가 없었던 그녀에게는 가끔 초소에 놀러 오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던가 봅니다. 전 나름대로 그녀를 따뜻하게 대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제 이기심을 돌이켜볼 때 그렇지 못한 것도 많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늘상 그녀를 놀리고 무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심부름도 많이 시킨 것 같은데 그녀는 한번도 싫다고 하지 않았지요. 저는 마음의 여지를 주지도 않았고요. 비슷한 이유로 그녀를 가슴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은데 그런 게 있었다면 저는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6개월 가량 그곳에 있었습니다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야박함에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시골 같아 보여도 부산의 한 지역이어서인지 도시 속의 어촌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는지 마을 분위기는 메말랐고 제가 자랐던 농촌의 인심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조금은 황량한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참 착하고 예뻤습니다. 아무렇게나 뽀글뽀글 퍼머한 머리에 허름한 옷, 쇠꼬챙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와 어눌한 말투, 새카맣고 해골같은 얼굴이었습니다만 저는 무지개 마을을 떠나고도 한참 뒤에야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더욱 그랬습니다.

그녀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잘 치료받고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좋지 못합니다. 그녀는 심장이 좋지 않았고 조금 많이 움직이면 숨가빠했습니다.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저는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무지개 마을을 떠나왔습니다. 이후에 그녀가 어찌 되었는지, 또 무지개 마을이 사라졌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무지개 마을의 마지막 밤에 그 고개를 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올해 초 옛 친구가 보낸 메일에서 그는 제가 무지개 마을에 있을 때 그곳을 찾아가던 날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다 넘기 전에 돌아보았던 불빛, 고개를 넘어 다대포 바다의 수많은 어선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 그때 느낌의 일부는 “저기 저 불빛”이란 노래에 들어 있습니다.

그날 이후 다시는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무지개 마을보다 더 잊지 못할 그녀입니다.

 

 

/1999. 3. 29.

 

+
그러니까 16년 전에 쓴 글이네요. 소소하게 몇 문장 고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입니다. 내 삶에서 그녀를 본 것은 불과 6개월 가량일 뿐입니다만 다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녀를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모레나 두 마르에 귀 기울이면 마음이 저려오곤 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그녀에 대해 한 것은 동훈형을 대할 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좋아했듯 그녀도 그랬던 듯 싶고요.

그리고 참으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녀에 관해 진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1999년 글을 쓰던 그때도 명확히는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무슨 잘못된 인성이 있는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초소 이웃집 가족이 이사갈 때도 비슷하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깡그리 잊어버린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점점 더 내 잘못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게 가야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핑계, “정들은 이웃에 인사도 없이…” 하던 정태춘 노래처럼 나는 그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잘못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또 저질렀습니다.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오빠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검색하다 그의 주소까지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지개 마을이란 이름은 아직 있지만 예전의 포구도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2015. 9. 9.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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