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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를 위하여

: 만돌이의 엘러지(Jealous Guy)

 

국민학교 6학년때 만돌이는 머슴이었습니다. 그때 키가 좀 크기도 했습니다만, 담임선생님은 시골에서 전학 오고, 키가 큰 아이들을 4명 뽑았습니다. 만돌이처럼 밀양에서 전학온 친구도 하나 있었고, 나머지 두 친구도 모두 고향 잃은 아이들이었습니다.(연필을 참 예쁘게 잘 깎는 친구도 있었고, 필기할 때 연필 아래에 자를 대고 ㄴ이나 ㄹ을 희안하게 편하고 재미있게 그어대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담임은 학교 내의 온실, 화단에 관한 관리책임자였고, 우리는 그의 머슴이 된 것입니다.(사실 만돌이는 시골에서 전학왔지만 게으른데다 별로 일은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체력도 꽝이었지요.) 그는 칭찬 보다는 일하기 싫어하는 우리를 꾸짖어가며 볶아댔고, 거의 날마다 화단에서 잡초를 뽑으며 온실도 관리하던 우리들이 바로 그의 잡초였습니다.(완전히 “The Wall”입니다.) 죽은 비둘기를 발견하고 우리 ‘머슴애들’이 묻어준 기억도 있으며, 졸업식날에서야 학교에 오신 어머니께 “왜 좀 자주 오시지 않고…” 하던 담임선생님의 야비한 말투가 아직 생각납니다.

어쨌거나 그 피곤한 머슴살이에 시달리면서 부산 와서 처음으로 과외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집안의 과외선생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선생님(DJ)의 집은 아주 조그만 2층 판자집이었고, 길 곁에는 복개되지 않은 하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돌이는 천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SH였습니다.

만돌이는 머슴이었고, 그녀는 전교부회장이었는데 과외수업에서 만난 것이었습니다. 아마 더 좋은 곳에서 과외공부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집이 워낙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리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집은 공교롭게도 예식장이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 운동장에서 우러러보던 그녀였습니다. 왜냐면 그녀는 부회장으로서 애국가를 할 때마다 흰 장갑을 끼고 나와 지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지휘하는 애국가를 따라 부른다는 것은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성스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바로 탁자 하나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같이 이야기 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머슴 만돌이로서는 가슴 아려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다니는 피아노 교습소 역시 바로 맞은편에 있었는데 만돌이는 그녀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돌이는 베토벤이 아닌 머슴이었습니다만,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그야말로 엘리제의 것이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렇게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 자신이 나의 엘리제였습니다.

만돌이는 그녀의 피아노를 듣기 위하여 몇시간씩이나 일찍 과외선생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볼 때까지 그녀의 피아노 소리를 들었습니다. 판자집 2층의 아주 작은 창으로 보이던 피아노 교습소가 지금도 눈에 선한 것 같습니다.

우리 6학년의 과외시간 전에는 1학년의 수업이 있었고, 만돌이는 그 1학년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아이들(물론 만돌이도 아이였지만)은 만돌이를 ‘삼촌’이라 불렀고, 무척이나 잘 따랐습니다. 이창진, 장??(장진호였던것 같습니다) 이런 아이들 이름이 생각납니다. 진호는 나중에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가진 돈 탈탈 털어 아이스크림 사줬던 것이 아직 기억에 있습니다. 그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마냥 즐거워했지만, 만돌이는 그가 영영 기억하지 못할 이별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두들 참 보고 싶습니다. 지금쯤은 스물 여덟, 아홉쯤 되었을테고 아마 다들 나보다 어른들일 것입니다.

DJ 선생님의 동생뻘로서 ‘조교’로 활동하던 ‘빤쭈아저씨’도 있었는데, 만돌이는 그에게서 버스 안에서 물건 파는 만담을 열심히 배워 써먹을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도 않은 ‘쌍권총은 두개다’라든가 ‘라이타돌에 맞아죽은 사나이’ 같은 희한한 소재들이었습니다. “차 안에 계시는 신사 숙녀 여러분, 흔들리는 차 속에서 잠시 말씀 드리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만돌이는 그 이야기들이 너무 좋아 수첩에 적어놓고 달달 외우고 다녔습니다.

어쨌거나 만돌이는 SH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그녀와의 신분적 차이는 너무도 큰 것이어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학교엘 가면 SH와 몇반 반장이 좋아한다더라 같은 가슴 아픈 소문들만 들었습니다. 만돌이는 반장은 커녕 분단장도 아닌, 아침마다 남보다 일찍 나와 낫을 들고 밭을 가는 촌놈 머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돌이는 그녀를 보는 것만 해도 행복하였습니다.(“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냐”던 만돌이와 비슷한 성을 가진 만적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당연히 알지 못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들 공부가 게으르다고 꾸짖던 과외 선생님이 드디어 매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고, 틀린 갯수대로 때릴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재미있고 괜찮은 분이었습니다. 같이 폭음탄 만들다 만돌이 손에 제법 심한 화상을 입은 적이 있긴 했습니다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님 또한 좋은 분으로 만돌이를 손자같이 대해주셨습니다. 나는 그 할머니의 사시가 무섭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드디어 시험을 보았습니다. 만돌이는 문제를 풀면서도 SH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녀가 틀리면 어쩌나, 그녀가 만약 맞게 된다면…… 운명의 시간, 시험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원은 아랑곳없이 SH도 제법 여러 문제를 틀려서 맞게 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만돌이는 구제불능, 귀가 빨개진채 엉덩이를 팍팍 맞았습니다. 그리고 SH가 손바닥을 맞는 일생일대의 비극적 장면을 과연 제대로 보아낼 수나 있을까 걱정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가호가 있었을까… DJ 선생님 왈, 여학생은 때리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돌이는 진심으로 마음으로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바로 그 순간 전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왜 여학생은 때리지 않나요?”

‘들킨 마음의 두려움’과 약간의 질투도 있었나 봅니다. 순간 선생님 또한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고, SH 역시 난감하고 슬픈 표정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순간 얼어붙어버린 만돌이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불의의 일격을 받은 탓인지 아니면 만돌이 말에 마음이 상한 탓인지 DJ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매를 들고 SH의 손바닥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그녀가 몇대의 매를 맞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힘든 것이었는지, 또 그녀보다 몇백배나 더한 아픔을 만돌이가 받고 있음을 누가 알고 느낄 수 있었을까요. 그 고통스런 느낌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고, 하소연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 속이 시원하냐?”던 DJ 선생님의 말이 내 가슴을 베고 지나갔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I was swallowing my pain, I was swallowing my pain… I didn’t mean to hurt you…” 내가 만약 그때 Jealous Guy를 알았다면 그 노래를 수천, 수만번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똑같은 어린 마음의 독백이 끊임없이 가슴속을 흐를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변함없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만돌이의 마음속을 흘러갔지만 꼭 그 노래의 마디 만큼의 깊은 상처를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그녀와 예전처럼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끝.

 

/1999. 1. 4.

 

+SH는 “승희”, “이승희”입니다. 초등학교 졸업후 본 적도 없고, 소식 들은 적도 없지만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긴 합니다. 그녀의 집이 있던 건물은 아직 남아 있지만 물론 예식장은 아닙니다.

무치

데.호따.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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